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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발디, 경쟁과 협업의 위대한 콘체르토 표준을 세우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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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6호 22면

민은기의 클래식 비망록

안토니오 비발디. [사진 사회평론]

안토니오 비발디. [사진 사회평론]

클래식 음악에 특별히 관심이 없다고 해도 비발디(1678~1741)라는 이름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전국 각지에 그의 이름을 딴 아파트도 있고 스키 리조트까지 있을 정도니까. 특히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는 위대한 클래식 작품을 말할 때마다 상위에 드는 명곡이자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클래식 작품 중 늘 다섯 손가락 안에 손꼽히는 곡이다. 그러나 비발디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딱 거기까지다. ‘사계’를 제외하고 비발디의 다른 작품들이나 인간 비발디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을 만나기란 정말 어렵다. 곡 하나로만 기억되는, 이제는 잊힌 한 때 유명했던 가수라고나 할까.

하지만 바이올린 연주의 대가였던 비발디는 18세기 초 당대 유럽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던 이탈리아 음악가이자 음악사를 통틀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많은 작품을 남긴 작곡가였다. 비발디는 베네치아에서 태어나 평생 그곳을 중심으로 활동했지만 다른 이탈리아 지역과 독일에까지 그 명성이 자자했다. 비발디보다 7년 늦게 태어난 바흐와 헨델이 그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았던 것은 물론이다. 오늘날에는 비발디가 협주곡 작곡가로 알려져 있으나 당대에는 오페라 작곡가로도 유명해서 돈도 많이 벌었다. 그러나 말년에 안나 지로라는 여가수와의 부적절한 염문설이 퍼지면서 인기가 폭락했고, 결국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

3악장 구조 협주곡 만들어 정착시켜

비발디의 도덕성 논란이 그의 명성에 치명적 타격을 주었던 것은 바로 그가 정식 서품까지 받은 가톨릭 성직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천식이 심해 미사를 집전하는 신부의 길을 가지 않고 사제이기는 하지만 교회에서 운영하는 자선학교인 오스피델라 델라 피에타의 음악교사로 일했다. 이곳은 고아와 사생아, 극빈자의 딸을 위한 여자 기숙학교로 일종의 고아원이었으며 여성에게 전문적인 음악교육이 허용되지 않던 시절 재능 있는 여아들에게 수준 높은 음악교육을 제공하는 명문 콘서바토리의 역할을 했다. 여기서 양질의 음악교육을 받고 성장한 여자아이들은 대부분 교양 있는 수녀나 훌륭한 신붓감이 됐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클래식 작품의 하나인 ‘사계’ 악보 초판. [사진 사회평론]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클래식 작품의 하나인 ‘사계’ 악보 초판. [사진 사회평론]

비발디는 25살부터 사망하기 직전인 62세까지 거의 40년간 이곳에서 여학생들에게 악기 연주를 가르치고, 이들이 연주할 음악을 작곡해서 베네치아의 시민을 대상으로 음악회를 열었다. 오래전부터 자유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해 온 베네치아는 유럽의 선진적인 문화를 주도했을 뿐 아니라 그 어느 곳보다 부유한 청중이 많았다. 비발디가 실력이 뛰어났던 학생들을 데리고 주기적으로 개최했던 오스피델라 델라 피아타의 음악회는 직업 오케스트라보다 더 훌륭한 연주 실력을 뽐냈고 돈 많은 청중들을 만족시켜 학교에 기부금을 끌어오는데 큰 역할을 했다. 비발디의 음악회에서 청중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은 단연 그의 협주곡이었다.

비발디는 모두 500개가 넘는 협주곡을 작곡했는데, 이들은 대부분 빠르고 활기찬 악장, 느린 악장, 또 좀 더 빠른 악장, 이렇게 대조적인 세 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빠름, 느림, 빠름의 3악장 구조를 협주곡에 처음 도입한 작곡가는 토마스 알비노니지만 그것을 유행시키고 협주곡의 표준으로 정착시킨 것이 바로 비발디다. 비발디가 협주곡에 3악장 구조를 채택한 이후 300년이 넘도록 거의 모든 작곡가들이 협주곡을 쓸 때마다 이 표준을 따르고 있다.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멘델스존과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과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사랑하는 협주곡들이 모두 이러한 3악장 구조다.

협주곡과 관련해서 비발디의 공헌은 그야말로 지대하다. 인류가 악기를 사용한 것은 오래되었지만 악기만으로 이루어진 기악음악이 등장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겨우 500년 전의 일이다. 게다가 초기에는 여러 대의 악기를 연주할 때 똑같은 악기들을 음역대만 다르게 만들어 주로 그들끼리만 연주했다. 그러니 비발디 시대에 들어와 다양한 악기들을 동시에 연주했다. 과거에는 없었던 매우 참신한 시도였다. 작곡가들이 각각의 악기에 어울리는 음악 양식을 개발하기 시작하던 것도 이때부터다. 하지만 음량과 음색, 음역이 들쑥날쑥한 여러 악기들이 한꺼번에 합주를 하면 무질서하거나 난삽해지기 일쑤였다. 따라서 일정한 규칙이 반드시 필요했는데, 그 훌륭한 모범을 제시해준 것이 바로 비발디의 협주곡이다.

독주·오케스트라 모두 돋보이게 작곡

빈 올드 시티 센터에 있는 공원 Votivpark에 있는 비발디 기념 조형물.ⓒGryffindor [사진 사회평론]

빈 올드 시티 센터에 있는 공원 Votivpark에 있는 비발디 기념 조형물.ⓒGryffindor [사진 사회평론]

오늘날 협주곡이라고 하면 보통 독주악기와 오케스트라가 협연하는 기악곡을 말하지만 비발디 시대에는 성악과 기악 합주곡을 두루 가리키는 넓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협주곡은 한마디로 음색과  음량이 서로 다른 악기들끼리 경쟁하면서도 협력하는 음악이다. 경쟁하면서도 협력한다는 복합적 의미는 협주곡의 원어에 해당하는 콘체르토라는 말의 이중적인 어원에도 잘 나타난다. 콘체르토(concerto)의 어원인 concertare가 라틴어로는 ‘경쟁하다, 서로 겨루다’는 뜻이지만 이탈리아어로는 ‘협력하다, 조화를 이루다’라는 뜻의 동사이다. 흥미롭게도 협주곡은 바로 이 두 가지 의미를 균형 있고 절묘하게 음악으로 표현한다.

협주곡은 독주자와 오케스트라 사이의 치열한 경쟁이다. 오케스트라가 내세우는 무기는 악기의 숫자와 음량이다. 다양한 음색을 가진 많은 악기가 동시에 연주되면 연주회장은 그 소리로 가득차고 청중 역시 그 입체적 음향에 압도된다. 이에 맞서 독주자는 화려한 기교를 동원해서 자신의 우월함을 뽐낸다. 악기의 음색이 선명하고 음역이 높다는 것도 장점이다. 오케스트라에 묻히지 않고 청중의 귀에 또렷이 자신의 소리를 들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쟁만으로는 부족한 법. 비발디의 협주곡은 독주자에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기회를 주면서도 오케스트라에게는 곡의 중심 주제를 담당시킨다. 공연장에서 청중은 솔로에 주목하지만 그들의 뇌리에 오래 기억되는 것은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후렴부다.

비발디는 그야말로 이 협주곡 양식의 달인이었다. 구조는 같은데 그 안에 담는 재료만 바꿔서 써낸 협주곡이 무려 500개가 넘는다. 본인 스스로 “필사가가 내 악보를 정사하는 것보다 내가 협주곡을 더 빨리 작곡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작곡 방식 때문에 곡 하나하나의 독창성을 높이 샀던 후대에 와서는 그다지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까마득한 후배 작곡가인 스트라빈스키로부터 “비발디는 500개의 협주곡을 작곡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협주곡을 500번 썼을 뿐”이라는 냉소적인 비아냥을 들어야 했으니 말이다.

비발디가 음악교사로 일했던 베니스의 자선학교 오스피델라 델라 피에타. ⓒMoonik [사진 사회평론]

비발디가 음악교사로 일했던 베니스의 자선학교 오스피델라 델라 피에타. ⓒMoonik [사진 사회평론]

하지만 비발디 협주곡의 진정한 가치는 형식에 있다기보다 풍부하고 다양한 표현에 있다. 자신이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라서 악기의 색채와 뉘앙스를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던 걸까. 비발디의 모든 협주곡은 선율이 상큼하고 리듬은 활기에 넘친다. 독주악기와 오케스트라가 선율을 주고받는 걸 넘어 흥미진진하게 극적인 긴장을 이어가니 지루할 틈이 없다. 그의 독주 협주곡 중에는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이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지만 첼로, 오보에, 플루트, 비올라 다모레, 리코더를 위한 협주곡도 적지 않다. 심지어 이전에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바순이나 만돌린 같은 비인기 악기를 위한 협주곡도 만들었다.

탁월한 실력으로 커다란 감동을 주었던 비발디가 부적절한 품행으로 인해 베네치아 청중으로부터 외면당했다는 것이 안타깝다. 그는 음악을 통해 막대한 돈을 벌었지만 젊어서부터 대단했던 낭비벽으로 인해 그 많던 재산을 다 탕진해 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말년에는 작품을 위촉받기 위해 암스테르담과 빈 등지를 돌아다니는 처지로 전락했다. 1741년 먼 타국 빈에서 사망했을 때 그의 수중에는 돈이 한 푼도 없어서 그의 장례는 극빈자를 위한 장례식으로 치러졌다.

참 허무한 종말이다. 그의 인생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자기 마음대로 바람처럼 살다간 천재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돈과 재능을 헛되게 낭비한 실패한 인생이라고 해야 하나. 굳이 그의 삶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댈 필요는 없을 듯하다. 우리 주위에 그런 예는 넘치도록 많으니까. 나에게 비발디는 경쟁과 협력이 위대한 음악 작품을 만든다는 중요한 이치를 가르쳐준 위대한 스승이다. 세상살이도 그렇지 않은가. 협력만 강조되면 발전이 더디고 경쟁만 있으면 삭막하고 피곤하다. 오늘, ‘사계’를 다시 들으며 협력과 경쟁의 지혜를 생각한다.

민은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 서울대학교에서 음악이론을 전공하고 파리 소르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95년부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음악과 페미니즘’ ‘독재자와 음악’ ‘대중음악의 역사’ 등을 주제로 여러 권의 저서를 출판했으며 최근에는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시리즈를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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