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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불화같은 ‘전복꽃찜’…화려한 개성 밥상 되살리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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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6호 19면

개성 음식 집성한 ‘온지음’ 조은희·박성배 셰프

한식을 연구하는 ‘온지음’ 맛공방의 수석연구원이자 미쉐린 1스타 레스토랑 ‘온지음’의 수석셰프인 조은희·박성배씨. 김상선 기자

한식을 연구하는 ‘온지음’ 맛공방의 수석연구원이자 미쉐린 1스타 레스토랑 ‘온지음’의 수석셰프인 조은희·박성배씨. 김상선 기자

“조랑이떡이라구, 잘 친 흰떡을 참기름을 묻혀가며 손바닥으로 가늘게 굴려요. 서울 흰떡보다 가늘게 되면 대칼로 잘룩하게 허리를 조이고 다음엔 아주 똑 끊고, 한 번 조이고 똑 끊고 하면 마치 조그만 누에고치 모양 같기도 하고 8자 모양 같기도 하고….” 소설가 박완서 선생이 쓴 『나목』의 한 문장이다. 박 선생의 고향은 옛 경기도 개풍군으로 개성이 지척이다. 덕분에 개성 사람들의 부엌 풍경과 맛깔스러운 요리를 묘사한 문장들에서 생동감이 넘친다.

개성장땡이·편수 등 레시피로 정리

한식의 뿌리를 찾아 개성 음식을 연구하고 80여 가지 레시피를 정리한 책 『온지음이 차리는 맛, 뿌리와 날개』. 김상선 기자, [사진 온지음]

한식의 뿌리를 찾아 개성 음식을 연구하고 80여 가지 레시피를 정리한 책 『온지음이 차리는 맛, 뿌리와 날개』. 김상선 기자, [사진 온지음]

그런데 실제로 개성 음식은 어떤 맛일까. 익숙한 듯 낯선 개성 음식에 대한 궁금증을 풀 수 있는 책이 출판됐다. 한식의 원형을 연구하고, 이를 바탕으로 전통을 현대적으로 구현해온 전통문화연구소 ‘온지음’ 맛공방이 펴낸 『온지음이 차리는 맛, 뿌리와 날개』다. 그동안 온지음 맛공방은 고조리서에 기반을 두고 조선의 궁중 음식과 반가 음식을 연구해왔다. 그 결과가 2016년 출판된 『온지음이 차리는 맛』이다. 6년 후 두 번째로 선보이는 책 『온지음이 차리는 맛, 뿌리와 날개』는 조선의 울타리를 넘어 고려 시대, 그중에서도 ‘개성 음식’에 주목했다.

왜 개성 음식일까? 천년 전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고려는 한반도를 최초로 통일한 자주적이고 개방적이며 창조적인 나라였다. 유불선(儒佛仙) 삼교가 공존했던 유일한 왕조였고, 송·원·금·일본·아라비아까지 외국과의 활발한 교류 속에서 경제력을 가진 호족 출신 귀족들이 문화를 이끌어 나갔던 시대기도 하다. 또 비색 청자, 나전칠기, 금속 공예, 불화 등 화려하면서도 정교하고 독창적인 문화유산을 꽃피웠다.

조랭이떡볶음. [사진 ⓒ이종근]

조랭이떡볶음. [사진 ⓒ이종근]

그렇다면 한식의 뿌리를 찾기에 가장 적합하지 않을까. 특히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의 밥상에는 시대의 미감이 잘 반영되지 않았을까. 『온지음이 차리는 맛, 뿌리와 날개』는 바로 이 질문에서 시작됐다.

『통일식당 개성밥상』의 저자이자 온지음 맛공방 자문위원인 정혜경 호서대학교 식품영양학과 명예교수는 책 서문에서 개성 음식의 맛을 이렇게 정의했다. ‘국제 교류 도시의 개방적인 맛’ ‘고려왕조의 역사가 살아있는 맛’ ‘불교의 맛’ ‘개성 상인의 풍요로운 맛’ ‘다양한 식재료의 조화가 빚어내는 맛’ ‘짜지도 심심하지도 않은 중간 맛’. 좀 더 설명하면 개성 음식에는 고려 왕실과 귀족이 향유했던 고급 미식문화, 주변국과의 교류로 얻은 개방적인 음식문화, 국교인 불교에서 비롯된 채식문화, 송나라에서 유입되어 독자적으로 발전한 차 문화가 골고루 조화를 이루고 있다. 특히 산과 들과 바다가 모두 인접한 개성 지역에선 고기와 곡식뿐 아니라 해산물·산나물·과일 등 식재료도 풍부해서 그야말로 풍요로운 미식 문화가 발전하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정 교수는 “조선이 건국되고 수도가 한양으로 옮겨지면서 개성 식문화 또한 따라왔고, 덕분에 서울 음식의 여러 뿌리 중 하나로 개성 음식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했다.

개성식 애호박선. [사진 ⓒ이종근]

개성식 애호박선. [사진 ⓒ이종근]

두꺼운 양장본으로 출판된 책은 260쪽이나 달하는데 앞부분에는 조선 후기 화가 강세황이 그린 ‘송도기행첩’을 비롯해 아름다운 고지도, 사진가 구본창이 찍은 청자 그릇 등 고려의 미감을 감상할 수 있는 이미지들이 자리 잡고 있다. 책 뒷부분에는 고려의 문장가 이규보와 이색을 비롯해 시인 백석, 소설가 박완서가 ‘개성의 맛’을 표현한 문장들이 들어 있어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입맛을 다시게 된다.

“서울 음식 뿌리 중 하나가 개성 음식”

햇된장에 간 고기를 넣고 양념 반죽해 둥글납작하게 빚은 다음 발효시키며 말려뒀다가 구워 먹는 개성장땡이. [사진 ⓒ이종근]

햇된장에 간 고기를 넣고 양념 반죽해 둥글납작하게 빚은 다음 발효시키며 말려뒀다가 구워 먹는 개성장땡이. [사진 ⓒ이종근]

그리고 그 사이에 80여 가지 개성 음식 하나 하나를 설명하고 또 직접 만들어 볼 수 있도록 레시피를 정리했다. 눈사람 모양의 ‘조랭이떡국’을 비롯해 한국 김치 중 가장 아름답다고 꼽히는 ‘개성보김치’, 고려가요 쌍화점에 등장하는 ‘개성 만두’와 ‘편수’ 등 현재까지 살아 있는 개성 음식뿐 아니라 점점 잊혀져가는 음식까지 형형색색 음식이 눈을 홀린다. 이 음식들을 연구하고 직접 조리해낸 이들이 바로 온지음 맛공방의 조은희·박성배 수석연구원을 비롯한 20여 명의 연구원들이다.

지난달 30일 온지음에서 만난 조은희·박성배 수석연구원은 “지난 3년간 개성 음식을 연구하면서 우리 음식의 뿌리에 새삼 자부심을 느꼈다”고 입을 모았다.

곱게 채썬 채소 고명의 포슬포슬한 질감이 꽃이 핀 듯 아름답게 보이는 전복꽃찜. [사진 ⓒ이종근]

곱게 채썬 채소 고명의 포슬포슬한 질감이 꽃이 핀 듯 아름답게 보이는 전복꽃찜. [사진 ⓒ이종근]

“개성 음식 앞에는 유난히 ‘개성’이라는 지역 이름이 붙은 게 많아요. 그만큼 식재료부터 조리법, 상차림까지 자부심이 남달랐다는 뜻이죠.”(조) “이렇게 화려하고 다양한 음식을 만들어냈다니 고려인들의 아이디어가 놀랍고, 먹는 것에 정말 진심이었구나 느꼈죠.”(박)

사실 국내에는 고려시대 식문화를 정리한 고조리서가 남아 있지 않다. 때문에 두 사람은 개성 음식을 연구하기 위해 다양한 장르의 책을 뒤졌다고 한다. 이규보의 문집 『동국이상국집』, 이색의 문집 『목은집』이 대표적이다. 이들 책속에는 두 문인이 평생 사랑했던 개성 음식과 술에 대한 찬양이 가득해서 자세한 조리법은 없어도 ‘이랬을 것이다’ 미루어 짐작하기에 좋다.

한편으로는 송나라 사신이 쓴 『고려도경』, 원의 고조리서 『거가필용』, 중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농업기술서이자 고조리서인 『제민요술』 등도 공부했다. 고려는 이웃 나라와 활발히 교류했기 때문에 고려 음식의 원형을 이들 중국 서적들에서 유추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 개성 출신인 매듭장 김은영 선생과 배우 전원주씨 등을 찾아가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개성 음식 조리법과 맛을 익혔다.

개성약과와 만두과. [사진 ⓒ이종근]

개성약과와 만두과. [사진 ⓒ이종근]

두 사람은 이런 방법으로 현존하는 개성 음식을 재연하고 미루어 짐작하는 한편, 전통 조리 방식에 기반을 둔 창조적 방법으로 온지음만의 개성 음식을 상상해내기도 했다.

“대표적인 음식이 ‘전복꽃찜’이에요. 전복요리를 이렇게 했다는 옛 조리법은 전해지지 않지만, 고려시대의 화려함을 밥상으로 옮긴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상상해봤죠. 더덕·도라지 등의 뿌리채소를 곱게 채 썰어서 전복찜 위에 올린 음식인데 그 모습이 마치 꽃이 핀 것처럼 우아하고 예뻐서 ‘꽃찜’이라는 이름을 붙였죠.”(조) “셰프들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칼질로 나물을 정말 곱게 채 썰었는데, 이는 고려 불화에서 볼 수 있는 세밀함을 표현하기 위해서였죠.”(박)

‘신선로’라고 불리는 열구자탕을 1인용으로 차려낸 것도 온지음만의 아이디어다. “쇠로 된 큰 냄비를 식탁에 올리는 대신, 개성에서 발달했던 탕반 문화를 반영해 1인용 열구자탕반으로 차려봤어요.”(조) “쇠고기 사태·양·허파를 삶아서 육수를 내고, 그릇에 밥을 담은 다음 육수를 붓고 한국 전통의 오방색(황·청·백·적·흑)을 떠올리게 하는 색색의 고명(낙지·전복·해삼·버섯·달걀·미나리·당근 등)을 올렸는데 단아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큰 호응을 얻었죠.”(박)

미쉐린 가이드 1스타 레스토랑 ‘온지음’의 수석 셰프이기도 한 두 사람은 새로운 음식을 만들 때마다 메뉴로 식탁에 올려 전통의 맛이 현대인들의 입맛을 어떻게 사로잡는지 꾸준히 살펴왔다. “익숙치 않은 상차림 때문에 처음에는 ‘이게 한식이냐’ 화를 내던 분들도 맛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시죠. 시대가 변한 만큼 우리 눈과 입맛도 변하고 있어요. 그 간극을 좁히면서 우리 시대의 맛을 어떻게 계승할까, 그게 큰 숙제에요.”(조) “옛날 맛을 전혀 모르는 젊은 친구들이 ‘새로운 맛’이라며 좋아하고, 오래 전 기억을 가진 어르신들이 ‘추억의 맛’이라고 칭찬해주실 때 보람을 느끼죠.”(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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