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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우주 굴기 이끈 동력은 'SF 소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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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가장 많이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공상과학(SF) 소설 작가다. 미래를 알고 싶다면 SF 소설을 보면 된다. 

올해 초, tvN에서 방영한 '알쓸인잡'에서 물리학자 김상욱 경희대 교수가 이런 말을 했다. 수십 아니 수백 년 후의 앞날을 학자도, 연구원도 아닌 SF 작가의 소설 속에서 찾으라니 다소 허무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었지만, 요즘 중국서 가장 높은 화제성을 자랑하는 중국 블록버스터 SF 영화 '유랑지구2(流浪地球·The Wandering Earth2)'를 보면 과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 유랑지구 속 한 장면

영화 유랑지구 속 한 장면

유랑지구는 세계 최고 권위의 SF 문학상인 휴고상(Hugo Award)* 수상자인 류츠신(劉慈欣)의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적색거성이 된 태양으로 지구와 인류 생존이 위협받자 중국인 우주비행사 부자(父子)가 35억 지구인을 다른 은하계로 이주시키는 스토리다.

⚗휴고상(Hugo Award)

세계과학소설협회(WSFS)가 매년 투표를 통해 장편, 중편, 단편 등 6개 부문에서 각각 최우수 SF 작품을 선정해 수여한다. 미국 SF계 대부인 휴고 건즈백을 기념해 지난 1955년 만들어졌다.

미국의 천문학자 칼 세이건(Carl Sagan, 1934~1996)은 생전에 "문명에는 두 가지 미래가 있을 뿐이다. 하나는 한 행성과 함께 멸망하는 것, 다른 하나는 다른 행성으로 문명을 전파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구의 생명력도 유한하기 때문에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행성'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둬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태양의 소멸까지 가기도 전에 인류는 멸망할 것이다. 화산 대폭발이나 행성 충돌, 지구 온난화도 인류 종말을 앞당기는 변수들이다. 지구에서의 삶이 예측 불가능해지자 2050년까지 인류의 화성 이주를 완료하겠다며 '화성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기업(미국 스페이스X)이나, 화성 탐사에 뛰어든 국가들이 많아진 것만 봐도 타 행성으로의 인류 이주 혹은 지구 자체를 공전궤도 밖으로 옮겨보겠다는 발상이 허무맹랑한 시나리오는 아닐 수 있다. 중국서 흥행 중인 '유랑지구2'가 관객들에게 더 와닿는 이유다.

사진 셔터스톡

사진 셔터스톡

이렇듯 미래를 시뮬레이트한 콘텐츠로 여겨지는 SF 장르에서 돌출된 존재감을 과시하는 나라는 미국이다. 코트라의 추산에 따르면 미국 내 활발히 활약 중인 SF 작가 수는 2000명에 이른다. 약 30여 명인 중국과 규모 면에서 격차가 있다. 그러나 중국의 내공도 만만치 않다.

SF계 최고 권위 '휴고상' 2년 연속 수상한 中
청나라 말부터 시작된 SF 향한 애정과 관심이 자양분 돼…

현재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SF 작가는 류츠신이다. 2015년 SF 소설 '삼체(三體)'로 아시아인 최초로 휴고상을 수상했다. 삼체는 1960년대 중국 문화대혁명 시기부터 수백 년 후 외계 함대와 마지막 전쟁까지 이어지는 지구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중국 과학 소설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려놓은 걸작으로 평가된다. 이듬해 중국 SF 작가 하오징팡(郝景芳)이 소설 '접는 도시(北京折疊, 북경절첩)'로 2년 연속 휴고상을 수상하며 중국 SF 소설의 국제적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몇 년 사이 중국 SF 소설의 주목도가 높아진 것은 어쩌다 하나 등장한 스타 작가 때문만은 아니다. 중국 SF 소설의 역사는 꽤 오래됐다. 시작은 청나라 말인 것으로 알려진다. 20세기 초, 중국을 대표하는 작가 루쉰(鲁迅)과 량치차오(梁启超)는 국가 번영을 돕는 도구로 과학 소설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루쉰은 쥘 베른의 '지구에서 달까지', '지구 속 여행' 등을 직접 번역하며 계몽에 앞장섰다. 이 무렵 '프랑켄슈타인(1818)'의 작가 메리 셸리, 쥘 베른, '타임머신(1895)'의 작가 H.G. 웰스 등의 서구 과학소설 작품의 번역본이 중국에 전파됐다.

최초의 중국 과학 소설로 여겨지는 작품은 1904년 황장댜오서오(荒江釣叟)라는 필명의 작가가 쓴 '달 식민지 이야기(月球殖民地小說)'다. 지구상의 모든 국가에 희망이 없다고 동의한 사람들이 달로 가 식민지를 건설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32년, 라오서(老舍)는 '고양이 나라 이야기(貓城記)'라는 작품에서 근대 중국의 모습을 화성에 살고 있는 고양이 인간들의 생활상에 빗대어 묘사했다. 이때의 작가들은 100년 뒤 달과 화성에 탐사선이 가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달 식민지 이야기' 책 표지(왼)와 '고양이 나라 이야기'의 책 표지. 출처 바이두백과

'달 식민지 이야기' 책 표지(왼)와 '고양이 나라 이야기'의 책 표지. 출처 바이두백과

1954년에는 정원광(郑文光)의 단편 소설 '지구에서 화성으로(从地球到火星)'가 출간됐다. 우주선을 훔쳐 화성으로 날아간 소년 세 명의 모험담을 담고 있다. 같은 작가가 1958년에 쓴 '공산주의에 바치는 카프리치오(共产主义畅想曲)'에는 온갖 과학적 상상력이 발휘돼 있다. 베이징에서 기차를 타고 남중국해 잉거하이(莺歌海)까지 48시간 만에 도달하며, 신의 영역인 기후를 필요에 따라 조절한다. 소설 속에서는 남부 광둥(廣東)성과 하이난다오(海南島)를 잇는 충저우(瓊州) 해협의 제방이 완성됐다고 묘사돼 있으며 화성으로 가는 우주선, 달 연구 기지도 등장한다.

톺아보면, 작가의 상상은 실제로 꽤 구현됐다. 중국은 올림픽과 같은 국제 행사나 국경절, 가오카오(高考, 대학 입시시험) 등 큰 행사가 있을 때 인공 강우를 활용해 기후를 조절한다. 베이징-홍콩 고속 열차는 약 2000㎞ 거리를 8시간 만에 주파하며, 충저우 해협 해저터널 공사는 추진 중에 있다. 2019년 중국은 역사상 최초로 달 뒷면에 우주선을 착륙시켰고, 2021년 화성에 탐사로봇 ‘로버’를 착륙시켰다. 옛 SF 소설을 보고 현대의 기술을 만들진 않았을 테지만, SF 소설은 사람들의 세계관을 확장시키고 관점을 바꾸는 데 공헌했다.

1970년대 후반에 이르면 중국 SF 소설은 황금기를 맞는다. 과학 전문잡지가 우후죽순 생겨나며 과학 소설이나 만화가 대중들에게 널리 전파되기 시작한 것. 예융례(叶永烈)가 1978년에 쓴 '소영통만류미래(小灵通漫游未来)'는 150만 부가 넘는 판매고를 올렸다. 1979년 창간된 잡지 '과환세계(科幻世界)'는 창간 44주년이 지났지만 현재까지 중국서 가장 영향력 있는 SF 잡지로 유명 작가들을 배출하고 있다. 이런 조류 속에 1980년대 상하이에 중국 최초의 SF 팬덤이 형성됐고, 많은 SF 소설 작가들은 팬덤에서 활동하며 중국 과학 소설 작가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류츠신도 그중 하나다.

콘텐츠를 향한 중국의 지원과 애정은 현시대에도 유효하다. 중국 국무원은 2020년 '국민 과학소질 행동계획 강령'을 발표했다. 과학 기술 혁신을 추진하고 과학 기술 보급과 과학 기술 문화 발전을 위해 SF 콘텐츠 산업을 중점적으로 성장시키겠다는 것이 골자다. 중국 지방 정부도 관련 정책을 제정해 산업 발전 펀드를 통해 자금, 기술, 인재 등 다방면에서 SF 콘텐츠 산업의 발전을 돕고 있다. 베이징시 정부는 5000만 위안(약 92억 원)의 특별 지원 자금을 마련했으며, 쓰촨성 청두(成都)시 정부는 SF 영화 실리콘밸리 건설을 위해 약 260억 위안(한화 약 4조 8000억 원)을 투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계획은 백 세대에 걸쳐 지속될 거야(本计划将持续一百代人)

류츠신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 '유랑지구'에 등장하는 대사다. 여기서 계획은 지구를 다른 은하계로 옮기는 일이다. 현재의 과학자나 연구원들이 우주의 먼지가 됐을지도 모르는, 까마득한 미래일지라도 '백만년지대계(百萬年之大計)'로 탐구와 연구를 이어가겠다는 포부가 느껴진다. 실제 중국은 기초과학 연구에 아낌없는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미국에 이어 전 세계 2위의 연구개발(R&D) 투자 국가다. 2019년에만 연구개발에 3100억 달러(약 387조 원)를 지출했다. 분야는 인공지능(AI), 양자, 반도체, 뇌과학, 바이오 테크, 의료, 우주·심해·극지 등 다양하다.

국가적 차원의 지원과 관심에 보답이라도 하듯, 중국 SF와 과학·기술 분야는 빠른 속도로 그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SF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먼 미래를 다룬다고 하지만, 작품을 보면 몇 년 사이 실현 가능한 기술들이 여럿 등장해 중국의 과학 및 우주 굴기가 허언이 아님을 느낄 수 있다. 유랑지구2에 등장하는 자율이동로봇(AMR)들은 CG가 아닌 중국 로봇 기업 유아이봇(优艾智合)에서 실제 생산 및 판매하는 제품인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유인우주국(CMSA)은 2029년까지 목성 탐사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차기 중국 SF 콘텐츠의 무대는 어떤 공간이 될까. SF 소설에서 그리는 미래와 과학·기술 발전의 시계가 점점 좁혀져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듯하다.

임서영 차이나랩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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