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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력과 대결 반복된 미·중 역사, 지금이 최악?

중앙일보

입력

차이나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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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uspected Chinese spy balloon drifts to the ocean after being shot down off the coast in Surfside Beach, South Carolina, U.S. February 4, 2023. REUTERS/Randall Hill

The suspected Chinese spy balloon drifts to the ocean after being shot down off the coast in Surfside Beach, South Carolina, U.S. February 4, 2023. REUTERS/Randall Hill

미·중 관계가 다시 거칠어지고 있다. 

지난 4일 미군 F-22 전투기가 자국 상공에서 풍선 모양의 비행체를 격추시키면서다. 중국 측은 비행체가 기상연구용 민간 비행선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미군 당국은 정찰 장비를 탑재한 ‘스파이 풍선’이라고 밝혔다. 적성국의 군용 비행체가 미국 본토를 침범한 이 사건으로 미 정부는 극도로 날 선 반응을 보이고 있다. 2001년 9·11 테러를 떠올린다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비행체로 미국에 EMP(전자기 펄스) 공격을 감행한다면 미국 땅 인구의 90%가 사망할 것이란 분석도 나왔다.

지난해 11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주석이 만난 후 개선될 조짐을 보이던 대화 분위기는 산산조각 나고 있다. 5일 베이징을 방문하려던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출발 몇 시간 전 방문을 취소했다. 바이든은 7일 상하원 합동 국정연설에서 “중국이 우리의 주권을 위협한다면 우리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행동할 것”이라고 엄중하게 경고했다. 같은 시간 중국 관영지 글로벌 타임스에선 “미국에 의해 신냉전이 시작됐다”(진찬룽·金燦榮 인민대 교수)고 평했다.

신냉전. 사진 셔터스톡

신냉전. 사진 셔터스톡

중국의 대만 침공 위협까지 노골화하며 미·중 관계의 역사에서 지금처럼 구조적이고 전면적인 대립·경쟁 국면을 맞은 적이 있었던가 싶다. 양국이 처음 외교 관계를 수립한 건 1844년이다. 아편전쟁(1840~42)으로 청나라가 영국 등 유럽 열강과 불평등 외교조약을 맺은 직후였다. 미국은 그들과 동등한 최혜국대우 지위를 요구했고 청은 수용했다.

제2차 아편전쟁(1856~60) 때 미국은 처음으로 중국과 군사적으로 충돌한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가 청과의 조약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공격을 일삼은 반면 미국은 신사적인 편이었다. 청 정부의 요청을 수용해 평화적으로 베이징에 입성해 미국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고 서로 비준서를 교환했다. 의화단 사건(1899~1901)이 터졌을 땐 미국 등 서방과 일본 8개국이 연합군을 이뤄 베이징에 진격했다.

이 시기 미국은 ‘감상적 제국주의자’였다. 자신은 탐욕스러운 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중국을 배려한다고 생각했다. 의화단 사건으로 중국으로부터 받은 전쟁 배상금을 미국에 유학 중이던 중국 학생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인에게 미국은 자국의 주권과 자존심에 상처를 낸 서구 열강 중 하나일 뿐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이 끝난 후 우드로 윌슨 미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로 중국인은 열강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미국이 중국에 군사적 도움을 준 것은 없었다. 일본은 거의 방해를 받지 않고 만주사변(1931~32)과 중일전쟁(1937~45)을 일으키며 대륙을 장악해 들어갔다.

일본에 위협을 느낀 미국은 일본에 대해 석유 등 전략자산 수출을 금지했다. 외통수에 몰린 일본은 진주만 기습(1941)으로 태평양 전쟁을 벌였고 본격적으로 미-중 군사동맹이 결성된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중국에 각종 무기와 총 10억 달러의 차관을 제공했고 국민당 실권자 장제스(蔣介石)는 중국 본토 지역 연합군 최고사령관에 임명됐다. 조지프 스틸웰 미군 중장이 참모장이 돼 공조 체제를 이뤘다. 하지만 전쟁 내내 장제스와 스틸웰 간 파워게임이 이어졌고, 장제스는 미국이 공산당을 지원할까 전전긍긍했다. 미국은 장제스 정부를 신뢰하지 않았다. 어쨌든 전쟁은 승리로 끝났다.

국공내전(1945~49) 때 미국은 사실상 중립을 지키며 양측 간 타협을 중재하려 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국민당뿐만 아니라 공산당도 2차 대전 때 미국이 제공한 무기로 전투에 나섰다. 본토에 공산당 정권이 들어서며 미국과 본토 중국 간의 동맹은 사라졌다.

6·25 전쟁(1950~53)은 양국 역사상 유일하게 치른 전쟁이었다. 하지만 무대는 두 나라 땅이 아닌 한반도였다. 1949년 신중국을 세운 후부터 마오쩌둥(毛澤東)은 미군이 중국 본토에 핵공격을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6·25 참전은 마오에겐 생존을 위한 자구책인 셈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 미국이 전면적 경쟁 상대로 생각한 적수는 중국이 아닌 소련이었다.

냉전이 본격화된 1954~55년 중국이 대만 점령지였던 진먼(金門)섬을 폭격하고 다천(大陳)섬을 침공했다. 백악관의 강경파들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본토 보복폭격을 주장했다. 아이젠하워는 ‘원자탄을 사용할 수도 있다’고 암시하기는 했지만 군사력 사용을 자제했고 이후 휴전 상태가 이어졌다.

베트남전(1955~75)이 벌어지자 중국은 중월 국경을 통해 전차, 장갑차 등 무기와 물자를 북베트남(월맹)에 지원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중국과 사이가 좋지 않은 베트남은 병력 지원은 거절했다. 미국은 중국으로 오폭 시 확전될 것을 우려해 북부 국경지대는 폭격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1972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베이징을 방문했고, 소련이란 공통의 적과 맞서기 위해 양국은 손을 내밀었다. 이후 1991년 소련 해체 때까지 일정 수준의 대(對)소련 군사 협력이 이뤄졌다. 197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중국은 미국산 무기를 구입했다. 1980년 1월 미 국방장관은 베이징을 방문, 소련군 활동 감시를 위해 신장(新疆) 자치구에 합동감청기지를 세우기로 합의하기까지 했다.

소련이 해체되고 중국이 급속하게 국력을 신장하면서 미·중 간 안보 갈등이 대만해협에서 간헐적으로 발생했다. 1995~96년 중국이 대만 총통 선거에 영향을 끼치기 위해 대만해협에 미사일을 발사하고 군대를 재배치하자(제3차 대만해협 위기), 미 7함대 인디펜던스와 니미츠 항모 전단이 대만 해역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때 중국 정부는 제대로 된 맞대응을 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미군은 2007년 항모 키티호크 함을 또다시 대만해협에 통과시켰고 이후 2018년까진 대만해협에 군함 파견을 하지 않았다. 1999년 미군 폭격기가 유고슬라비아 주재 중국 대사관을 오폭했고, 2001년엔 양국 군용기가 충돌하는 등 우발적 사건들이 발생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시기 중국이 세계 경제 무대에 전면적으로 등장하면서 미·중은 경제적으로 밀착했다.

2010년대 미국의 ‘아시아로의 재균형(rebalancing),’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에 대한 중국의 현상변경 시도, 이에 대응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주도한 미·중 무역전쟁, 중국과 경제적으로 탈동조화(decoupling)하려는 미국과 서방, 시진핑 정권의 대만 무력 통일 위협, 중국과 러시아의 밀착 등 2010년대 후반 이후 미·중 관계는 신냉전 체제로 굳어져 가고 있다. 6·25처럼 전쟁을 치르기도 하고 냉전 초기 적성국으로 서로를 인식하기도 했지만 이렇게 전면적, 구조적 대결 관계였던 적은 없어 보인다.

사계절처럼 밀월과 적대가 시간을 두고 반복돼 오던 미·중 관계의 역사는 한파를 통과 중이다.

이충형 차이나랩 특임기자(중국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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