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부터 이달 7일까지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와 폴란드 바르샤바를 오가며 러시아의 침공 이후 달라진 우크라이나인의 삶을 목도했습니다. 폐부를 찌르는 듯한 공습경보 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맴돕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되다시피 한 삶터, 그래도 일상을 꿋꿋이 버텨나가고 있는 우크라이나 사람들.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겐 익숙해져버린 사이렌 소리처럼 이 전쟁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이 떠나가고 잊혀지는 것이 가장 두렵다고 했습니다. 기자가 우크라이나 현장에서 만난 동갑내기 운전사 제냐(30)는 “팁은 주지 않아도 좋으니 더 많이 만나고, 더 많이 듣고, 더 많이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제냐의 당부를 떠올리며 기사에 담지 못한 내용을 기록으로 남깁니다.
#1. 사선(Deadline)
지난 3일(현지시간) 오전 10시 30분. 키이우 한 호텔에 있던 기자는 두 개의 사선을 동시에 넘나들고 있었다. 13층 호텔 방까지 ‘웨에엥-’하는 공습경보가 울리고, 곧이어 휴대전화 경보음과 호텔 대피 방송이 흘러나왔다. 창밖을 내다 보며 속으로 “제발 아무 일이 없기를…”하고 되뇌었다. 한국 시간으로는 오후 5시 30분. 다음 날 신문에 기사를 담기 위해선 기사 작성을 마무리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초년병 기자 시절 한 선배가 해준 말이 떠올랐다.
“왜 마감 시간을 ‘데드라인’이라고 부르는지 아니? 못 지키면 기사는 죽는 거다.”
생과 사가 한순간 갈리는 전장터에 놓인 하나의 사선. 그리고 시시각각 다가오는 기사 마감이라는 또 하나의 사선(데드라인). 두 개의 사선에 놓인 묘한 느낌이었다.
매일같이 울리는 사이렌은 1년 가까이를 끌어온 전쟁에 초연해지려는 우크라이나인들의 삶을 부단히도 괴롭힌다. 귀를 찢는 경보음 자체가 주는 서늘한 긴장감도 있지만, 매일 끊기는 전기처럼 하루에도 몇 차례나 일상이 턱턱 단절됐다. 경보가 울리면 밥을 먹던 식당에서도, 장을 보던 마트에서도, 출근 중인 버스에서도 나와야 한다. 경보가 길어지면 천정부지로 오르는 택시 요금에 출근길이 막막해진 사람들이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는 일도 부지기수다.
하루는 햄버거 패스트푸드점에서 점심을 해결하던 도중 갑자기 손님들이 너나 할것 없이 자리를 정리하며 일어서 놀란 일이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공습경보가 울려 밖으로 나가야 한단다. 한 젊은 여성이 식어버린 감자튀김을 씹더니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다 이내 아무렇지 않게 친구들과 대화를 이어갔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그렇게 전쟁을 견뎌내고 있었다.
#2. 온기
우크라이나에서는 사람도, 도시도 말 그대로 밝지 않다. 아니 밝을 수가 없다고 해야 맞겠다. 전기가 곧잘 끊기는 데다 햇볕이 잘 들지 않는 겨울철이어서 우중충한 하루가 반복된다. 전자기기 매장 앞에는 온갖 종류의 충전식 랜턴이 달려있고, 거리엔 비상 전력을 만들기 위한 소형 발전기들이 “털털털” 돌아가는 소리가 시끄럽다.
도시는 밝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온기를 잃지 않고 있었다. 지난달 28일 바르샤바에서 출발해 키이우로 향하는 버스에서 만난 올가 할머니가 그렇다. 이 여정은 운이 좋으면 15시간, 보통은 18시간 정도가 걸린다. 피난길에 올랐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탓에 안 그래도 좁은 버스 안은 온갖 종류의 짐에 반려동물까지 빼곡히 찬다. 단 한 명의 사람도 웃으면서 떠드는 것을 보지 못했다. “전쟁을 겪는 사람들이라 우울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옆자리의 올가 할머니가 기자의 이런 생각을 바꾸게 했다. 혼자 출장길에 오른 기자는 많은 짐을 이고 움직여야 해서 중간중간 쉬어가는 버스에서 내리기 어려웠다. 잠시 내리려다가도 가방 속에 든 달러 뭉치가 눈에 밟혔다. “전쟁 중인 나라니 어떤 상황이 생길지 모른다”며 엉덩이에 진물이 나도록 무거운 가방을 안고 있는 기자에게 옆자리 올가 할머니는 눈짓으로 괜찮다며 잠시 나가 바람을 쐬고 오라고 했다. 작게 미소 짓는 얼굴에서 안도감이 느껴졌다. 웃지 않을 뿐 먼 이국 사람을 배려해주는 따뜻한 마음은 고스란히 느껴졌다.
키이우에서 만난 이들도 일상의 작은 행복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오후 11시면 통금이 시작되지만 바에서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보내는 시간은 더 이어지곤 했다. 시내에서 만난 보그다나(25)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얘기를 전할 땐 두려움에 떨고 있지 않다는 걸 꼭 말해줘.”
#3. 눈동자
현지 주민들과 대화할 때는 통역사가 내용을 전달해주기 전까지 그들의 눈을 빤히 들여다볼 때가 많았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온 지금도 때로는 무너진 도시보다 그들의 눈동자가 먼저 떠오른다. 지난달 30일과 31일 러시아군의 총칼이 할퀴고 간 여러 지역을 찾았다. 러시아의 침공 루트 선상에 놓여 있던 마을들, 그리고 피해가 가장 심했던 이르핀‧부차‧보로댠카다.
포격으로 부서진 이르핀의 아파트에서 주름진 얼굴의 올렉산드르(64)를 만났다. 그에 앞서 만난 한 주민은 참혹했던 상황을 떠올리는 게 너무 고통스럽다며 인터뷰를 사양했다. 올렉산드르에게도 쉬운 일은 아닌 듯했다. 기자가 대화를 요청하자 그는 통역사와 잠시 대화를 나눴다. 통역사는 “시간을 좀 달라고 합니다”라고 전했다. 올렉산드르는 멍하니 앉아 구겨진 담배 하나를 꺼내 피우기 시작했다. 공허한 그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듯했다. 한숨을 내쉬듯 간신히 뱉은 말은 이랬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 이곳을 직접 보고 판단해줘. 크게 할 말이 없네.”
어떤 이들의 눈동자에선 채 여과되지 않은 분노가 읽혔다. 민간인 집단 학살이 일어난 부차에서 만난 예브게니(52)는 말투는 차분했지만 눈빛은 섬뜩하다는 느낌을 줬다. 그는 러시아군이 점령한 한 달을 때론 카자흐스탄인 흉내를 내면서, 때론 한때 구소련의 군대에서 함께 싸웠던 과거를 언급하면서 살아남았다고 했다.
#4. 고단함
지난 4일 바르샤바에서 만난 폴란드인 가운데는 우크라이나 지원에 회의감을 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크라이나인이 네일샵을 이용하고 나서는 자신이 난민이니까 공짜로 해 달라고 했다는 얘기, 어떤 보호시설은 우크라이나인은 없고 부랑자들이 점령했다는 얘기도 들렸다.
바르샤바에 있는 전쟁 난민 보호시설에서 만난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지내기에 어려움이 없느냐는 물음에 대체로 답하기를 꺼려 했다. 다만 그중 어떤 이는 “이곳은 매우 친절하고 잘해줍니다”라고 했다. 보호시설은 난민의 더 나은 생활 여건을 만들어주기 위해 고심하고 있었지만, 칸막이로 된 좁은 공간에서 생활하는 이들에게 어려움은 당연히 있을 터. 그럼에도 우크라이나 난민들은 그런 얘기를 입밖에 내는 것을 원치 않은 듯했다. 고단하고 불편한 환경이라도 묵묵히 이겨내는 게 익숙해져 있는 것 같았다.
보호시설이 난민 한 사람 당 지출하는 금액은 하루 12달러(약 1만5000원). 문제는 후원이 점점 줄어든다는 점이다. 시설 관계자는 “지난해 여름 이후로 후원이 줄고 있어 한 달 운영비 정도만 남아 있다”고 했다.
#5. 희망
보호시설 내 아이들을 위한 교실 중 한 곳에 들어갔을 때 환한 웃음으로 달려오던 아이들 니카와 비우, 다비드는 지금도 눈에 선하다. 기자를 만나선 대뜸 안아달라고 하고, 목을 조르고, 안경을 가져가 장난을 치기도 했다. 예정된 시간보다 5시간이나 늦게 도착한 버스로 취재 시간에 쫓겨 허겁지겁 찾아갔을 때의 일이다. 전쟁 지역 취재의 긴장감에서 잠시 벗어나 기자도 처음으로 활짝 웃을 수 있었다.
보호시설 입구에는 미국의 성조기와 영국의 유니언잭 옆에 자리한 태극기가 눈에 띄었다. 아이들이 기자를 보자마자 반가워하며 안긴 것도 한국인들이 토요일 오전마다 방문해 놀아주기 때문이란다. 교실에는 세계 각지에서 도움의 손길로 전달돼 온 학습 도구와 스피커, 스크린 등이 있었다. 교사도 자원봉사자다. 아이들 교육에 문제가 없도록 구체적인 교육 과정을 짜는 것이 그들의 과제다. 이곳 아이들의 웃음을 지키는 건 길어져가는 전쟁에도 꺾이지 않는 사람들의 따뜻한 관심과 지원이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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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1년을 맞아 중앙일보가 2월 1일부터 디지털 아카이브 페이지를 오픈했습니다. 전쟁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이 비극에 끝은 있는지, 서방의 우크라이나 지원과 러시아의 맞대응 등 지난 1년의 기록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디지털 아카이브 보기 ☞ https://www.joongang.co.kr/digitalspecial/4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