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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트트랙, 양궁에서 배워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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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정제원 기자 중앙일보 문화스포츠디렉터
정제원 스포츠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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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쇼트트랙은 세계 최강이다. 호리병 주법은 물론 날 들이밀기 등 다양한 전술을 개발해 국제 대회에서 숱한 메달을 따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한국 쇼트트랙은 최고의 복마전으로 불린다. 갈등과 잡음이 끊이지 않아서다. 지도자가 선수를 때리는 건 다반사, 선배와 후배의 갈등은 물론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성폭력 사건도 심심찮게 일어난다. 파벌이 갈려서 싸우기를 벌써 20년, 해묵은 갈등과 싸움은 현재 진행형이다.

최근 빙상팀 지도자 공모를 진행했던 성남시청은 고심 끝에 “코치직 합격자가 없다”고 발표했다. 러시아로 귀화한 빅토르 안(한국이름 안현수)과 지난 2022년 베이징 겨울올림픽 당시 중국 국가대표팀을 이끌었던 김선태 감독, 젊은빙상인연대 대표로 활동한 여준형 전 국가대표팀 코치 등이 지원했지만, 결국 모두 탈락했다. 이 과정에서 성남시청 소속 선수들은 “공정하고 투명하게 코치를 선발해달라”는 입장문까지 발표했다. 여론의 향배에 촉각을 세우던 성남시청은 결국 7명의 지원자 중 합격자를 내지 못하고 코치 선발을 다음으로 미뤘다.

20년째 잡음 끊이지 않는 빙상계
성남시청 코치도 제대로 못 뽑아
파벌주의·줄세우기 구습 버려야

2022년 베이징 겨울올림픽 당시 중국 쇼트트랙 대표팀을 지도했던 김선태 감독(왼쪽)과 빅토르 안. [연합뉴스]

2022년 베이징 겨울올림픽 당시 중국 쇼트트랙 대표팀을 지도했던 김선태 감독(왼쪽)과 빅토르 안. [연합뉴스]

성남시청의 코치 선발 과정은 한국 쇼트트랙의 부끄러운 민낯을 다시 한번 보여준 해프닝이었다. 일부 빙상계 인사들은 지원자 명단이 알려지자 “빅토르 안은 러시아 귀화 전 올림픽 금메달 연금을 일시불로 받아갔다”고 비난했다. 이들은 또 “김선태 감독도 국내에서 선수들을 가르칠 자격이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선수들의 의견은 다르다. 국가대표 선수들이 포함된 성남시청 선수들은 “선수들이 원하는 것은 훈련과 경기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상황이 되는 것”이라며 “시합을 뛰는 건 결국 선수들이다. 훌륭한 팀을 이끌기 위해선 경력이 가장 우수하고, 역량이 뛰어나며 소통이 가능한 코치님이 오셔야 한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선수들이 원하는 지도자가 누구인지 쉽게 알 수 있다. 러시아로 귀화한 빅토르 안이나 김선태 전 중국대표팀 감독은 경력과 역량 면에서 뛰어난 지도자다. 빅토르 안은 올림픽 쇼트트랙 전 종목에서 금메달을 딴 유일한 선수다. 2006년 토리노 올림픽에선 모든 종목에서 메달을 땄다(물론 이때는 빅토르 안이 아닌 안현수였다). 2011년 러시아로 귀화한 이후엔 이름을 빅토르 안으로 바꾸고 2014년 소치올림픽에 출전했다. 이 대회에서도 그는 금메달 3개와 동메달 1개를 땄다.

그러자 그해 2월, 박근혜 대통령이 말했다. “안 선수는 최고의 실력을 갖추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자신의 꿈을 펼치지 못하고 다른 나라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안 선수의 문제가 파벌주의, 줄 세우기, 심판 부정 등 체육계 저변에 깔린 부조리와 구조적 난맥상에 의한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

대통령의 서슬 퍼런 발언 이후 청와대 수석과 정부가 팔 걷고 나서서 쇼트트랙계의 난맥상을 파헤쳤다. 하루가 멀다고 부조리 근절 방안이 나왔고 많은 이가 옷을 벗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는데도 쇼트트랙계의 잡음과 갈등은 끊이지 않는다. 살아남기 위해서 정치권에 줄을 대는가 하면 중상모략으로 상대편을 깎아내린다. 최근엔 ‘제2의 빅토르 안’이 등장했다. 훈련 도중 남자 후배의 바지를 잡아내리는 장난을 쳤다가 빙상연맹으로부터 1년 자격정지를 당했던 임효준이다. 그는 2021년 중국으로 귀화한 뒤 린샤오쥔이란 이름으로 최근 월드컵 5차 대회에 출전, 2개의 금메달을 땄다.

한국 쇼트트랙은 도대체 왜 이렇게 시끄러운가. 체육계 관계자에게 물어봤더니 “한마디로 먹을 게 많기 때문”이라고 했다. 국제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면 (남자선수의 경우) 병역 면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데다 지도자가 돼도 안정된 수입을 올릴 수 있기 때문에 죽기 살기로 싸운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정답은 아닌 듯하다. 국제 대회에서 많은 메달을 따내는 양궁의 경우 잡음이 일절 없다. 양궁 대표선수가 되는 건 쇼트트랙 대표가 되기만큼이나 어렵다. 그런데도 양궁협회는 공정한 선발 방식과 철저한 관리로 갈등의 소지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다. 물론 쇼트트랙과 양궁은 다르다. 양궁은 기록경기지만, 쇼트트랙은 몸싸움이 치열한 종목이다. 그렇다 해도 20년 넘도록 진흙탕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는 모습은 더는 참기 어렵다. 또다시 정부와 사정 당국이 나서서 칼을 휘두르는 불행한 사태를 맞기 전에 빙상인 스스로 각성해야 한다. 올림픽 메달만이 능사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