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주역세상](54) 본분, 선 넘기

중앙일보

입력

차이나랩

차이나랩’ 외 더 많은 상품도 함께 구독해보세요.

도 함께 구독하시겠어요?

여지없다. 일요일 광화문은 시위대 세상이다. 한쪽은 '윤석열 탄핵', 다른 한쪽은 '이재명 구속'이라는 팻말을 들고 악을 써댄다. 그 옆에는 '노동 탄압'을 규탄하는 시위도 열린다.

진보와 보수는 오로지 서로만 바라보며 비난하고, 쌍욕을 내뱉는다. 보수의 가치, 진보의 가치에는 관심 없어 보인다. 노조는 '노조'에 만족하지 않는다. '공장 설립할 때 내 허락을 받으라'며 사(社)측 영역을 파고든다.

자기의 본분(本分)이 무엇인지는 일찌감치 잊었다. 지켜야 할 선(線)은 너무 쉽게 무너진다. 그러니 어지럽다.

시위, 또 시위... 뉴스1

시위, 또 시위... 뉴스1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주역 10번째 괘 '천택리(天澤履)'에서 답을 찾아보자.

하늘(乾, ☰)아래 연못(兌, ☱)이 놓인 형상이다. 하늘은 비를 뿌리고, 연못은 비를 모아 땅을 윤택하게 한다. 서로 넘보는 일이 없다. 하늘은 위에서, 연못은 아래에서 자신이 맡은 일, 본분을 다할 뿐이다.

괘사(卦辭)는 이렇게 말한다.

履虎尾, 不咥人, 亨
호랑이 꼬리를 밟았으나 사람을 물지 않으니, 형통하다.

호랑이 꼬리를 밟았는데도 물리지 않았다. 왜냐? 본분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과 연못처럼 자기 본분을 지키며 서로 자기 역할만 다한다면, 호랑이 꼬리를 밟더라도 물리지 않는다. 그러니 형통하다.

반대 경우는 어떨까. 여지없이 물린다. 세 번째 효사는 이렇게 말한다.

眇能視, 跛能履, 履虎尾, 咥人凶
애꾸눈으로도 잘 볼 수 있다고 우기고, 절름발이로도 멀리 걸을 수 있다고 우긴다. 호랑이 꼬리를 밟아 물리니, 흉하다.

세 번째는 원래 양(─)의 자리인데 음효(--)가 왔다. 어울리지 않는다. 자격도 없고, 능력도 안 되는 자가 본분을 잊고 달려드는 꼴이다. 이런 자가 흔히 선택하는 건 무력이다. 효사는 이렇게 이어진다.

武人爲于大君
무인이 임금 되려 설친다.

논리보다는 힘으로만 밀어붙이려는 자가 '무인(武人)'이다. 자기주장이 통하지 않으면 머리띠 두르고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뭉쳐 세력화된 그들은 자동차 라인을 세우고, 트럭을 막는다. 쇠 구슬을 쏘면서도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니 호랑이 밥이 되고 만다. 흉(凶)하다.

보수든, 진보든, 노조든, 이제 본분을 말하자. 호랑이 꼬리를 밟아도 마음 편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이번 주말은 겸허하게 주역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한우덕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