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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에 치욕 안겨준 英…그 런던에 '12만명 차이나타운' 생긴 사연 [채인택의 세계 속 중국]

중앙일보

입력

런던에 위치한 차이나 타운. 2022.09. 셔터스톡

런던에 위치한 차이나 타운. 2022.09. 셔터스톡

차이나타운은 중국에 가까운 동남아시아나 대항해 시대 이후 전 세계 바다로 진출했던 서구 해양국가의 수도나 대도시엔 으레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영국의 수도 런던에 있는 차이나타운은 특별하다. 그야말로 시내의 중심부에 떡 하니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연극‧뮤지컬‧공연‧전시의 중심지로 런던의 대표적인 문화 지역인 웨스트엔드에 위치한다.

중국에 영국은 아픈 기억의 나라다. 

청나라에 치욕과 상처를 안겨준 아편전쟁 뒤인 1841년 광둥(廣東)성의 한적한 항구였던 홍콩을 영국이 차지하면서 중국인의 영국 이주가 조금씩 진행됐다. 현재 영국에는 43만 명 정도의 중국계 영국인이 거주한다. 잉글랜드에 38만 명, 스코틀랜드에 3만 3000명, 웨일스에 1만 4000명, 북아일랜드에 6000여 명 등의 분포다. 이 가운데 12만 명 정도가 런던에 산다. 1997년 7월 1일 홍콩의 중국 반환 당시 영국 일각에선 홍콩인들에게 영국 국적을 부여하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이뤄지진 못했다. 만약 그랬다면 홍콩과 영국의 운명이 동시에 달라졌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역사에 가정은 금물일 것이다.

역사적으로 영국을 가장 먼저 찾은 중국인은 청나라 시절 난징(南京) 출신으로 가톨릭 예수회 선교사들과 함께 유럽에 온 선푸중(沈福宗‧대략 1658~1691)이라는 남성이었다. 그는 1681년 예수회 사제들과 함께 마카오를 떠나 플랑드르(현재 벨기에), 이탈리아, 프랑스, 잉글랜드를 두루 여행한 것으로 전해진다.

프랑스에선 국왕 루이 14세(1638~1715, 재위 1643~1715) 앞에서 젓가락 사용법과 한자를 붓으로 쓰는 것을 보여준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에선 나중에 명예혁명으로 밀려난 국왕 제임스 2세(1633~1701, 재위 1685~1688)를 알현해 역사상 이 나라를 찾은 첫 중국인으로 기록됐다. 그는 옥스퍼드대를 방문해 교수들과 대화하고(라틴어를 쓴 것으로 추정), 1602년 문을 연 보들리 도서관을 찾아 장서로 보관 중이던 중국 서적이 거꾸로 꽂힌 것을 보고 바로 잡아줬다는 일화가 전한다. 당당한 중국인이다. 선푸중은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가서 예수회에 입회했으며, 중국으로 돌아가는 항해 도중 병이 나서 포르투갈 식민지인 동아프리카 모잠비크에서 숨진 것으로 기록됐다.

선푸중이 영국을 방문한 17세기 현재 차이나타운은 인근 템즈강 항구의 배후 지역이었다. 사실 템즈강을 끼고 있는 런던은 수많은 도크로 이뤄진 거대한 하상(河上) 항구였다. 1841년 영국이 홍콩을 차지한 뒤 중국에서 오는 선박 등에서 일하는 중국인들이 근처에 상륙하거나 잠시 거주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차이나타운이 형성된 건 아니었다.

런던의 중국인이 지금의 차이나타운 근처인 소호 지역에 본격적으로 모여 살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초였다. 당시엔 합법이었던 아편방이 생긴 게 계기였다고 한다. 청나라를 무너지게 만들었다는 아편에 외국으로 나온 중국인도 빠져들었던 모양이다.

이 지역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의 폭격으로 손상됐다가 재건됐다. 종전 뒤 이곳에 중국 음식점이 증가하면서 중국인이 더욱 많이 모였다. 외국 문화에 대범해진 귀환 병사를 중심으로 중국 요리가 인기를 끌고, 홍콩에서 영국으로 이주가 늘었기 때문이다. 중국인 이주는 1949년 대륙에서 공산당이 권력을 잡은 이래 더욱 속도를 냈다.

지금 위치에 자리 잡은 것은 1970년대였다. 그 전에 런던 차이나타운은 그보다 조금 더 북쪽인 소호 지역에 있었다. 소호 지역이 유흥가로 번창하면서 차이나타운은 그보다 조금 남쪽인 지금의 지라드 거리(Gerrard Street)로 서서히 옮겼다. 젠트리피케이션이 차이나타운을 이주시켰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이곳은 중국음식점이 즐비하다. 대개 홍콩을 둘러싼 광둥 지역 요리다. 메뉴에 짜장면(炸醬麵)이라고 적힌 음식도 있지만 한국 짜장면과는 완전히 다르다. 갈색 중국 된장에 고기, 채소를 볶아 얹어준다. 탕수육은 당연히 있다. 소스를 부어서 먹는 ‘부먹 스타일’이다. 19세기 일본 나가사키에서 개발됐다는 짬뽕은 물론 찾을 수 없다.

대신 다양한 딤섬이 런던 차이나타운의 시그니처다. 용기가 있으면 참새 혓바닥 딤섬에 도전할 수도 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돼지 창자 한가운데에 대파를 넣고 튀긴 뒤 썰어서 내는 요리도 있었는데 최근에는 찾을 수 없다. 중국 음식점용 채소를 재배하는 농장과 필요한 조개를 채취하는 선박에 중국 본토에서 온 노동자들이 일한다는 소문도 있다.

지라드 거리의 한가운데에는 식당, 빵집과 함께 룽먼(龍門) 수퍼 등 홍콩·중국 음식 재료 등을 파는 가게가 몇 군데 있다. 한국과 일본 음식 재료도 취급한다. 김치와 신라면은 인기 메뉴다. 한국산 춘장은 한국인에게 인기다. 이곳에선 한자를 대륙의 간자체가 아닌 홍콩과 대만에서 쓰는 번자체를 쓴다.

주목할 점은 런던 차이나타운이 자리 잡은 웨스트엔드는 문화의 중추 지역일 뿐 아니라 문화 산업과 관광, 외식 산업의 중심지라는 사실이다. 제조업이 무너져 1980년대 마거릿 대처(1925~2014, 재임 1979~1990) 총리 시절 혹독한 구조조정을 겪었던 영국은 1990년 지식문화산업의 발전에 힘입어 부활의 날갯짓을 했다.

영국의 되살아나는 날갯짓의 핵심은 문화와 관광이었다. 1990년대부터 코로나19 팬더믹 직전까지 런던 웨스트엔드 거리에선 그야말로 호황의 향기가 느껴졌다. 문화 중심지인 런던 웨스트엔드의 뮤지컬과 연극 공연장은 항상 만원이었다. 거리 곳곳에는 뮤지컬과 연극 티켓을 파는 가게가 즐비했다. 레스터 광장 주변에는 훌륭한 영화관도 줄줄이 있다. 글로벌 스타들이 자기 작품의 세계 최초 상영을 보러 이곳을 찾는다. 이 지역의 피커딜리 서커스와 레스터 스퀘어는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으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다.

차이나타운은 1990년대 지식문화산업 강국으로 영국과 런던이 부흥하는 현장을 지켜본 목격자라고 할 수 있다. 런던 차이나타운이 문화‧관광‧외식 산업의 중심지에 위치한 덕분이다. 런던 주민은 물론이고 국내외에서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은 웨스트엔드에서 문화생활을 즐기면서 중국음식점에 가는 것을 당연시했다. 차이나타운의 중국음식점은 그야말로 런던을 대표하는 관광 상품으로 자리 잡았다.

상당수 런던 시민들은 외식하게 될 때 중국 음식을 상당히 선호한다. 미국처럼 종이상자에 담아 ‘테이크아웃’을 하는 것보다 중국 식당에 앉아 이국 느낌을 느끼며 요리를 이것저것 맛보는 것을 즐긴다. 광둥 요리를 중심으로 하는 레스터 스퀘어 차이나타운의 중화요리의 맛이 뛰어난 것도 영국인과 런던을 찾은 전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이유의 하나일 것이다.

웨스트엔드 지역에선 뮤지컬이나 연극은 물론 인근 트라팔가르 광장에 있는 세인트 마틴 인더 필즈(St Martin-in-the-Fields) 교회에서 바로크 음악 상시 공연을 즐길 수 있고, 그곳에서 지척에 있는 잉글리시 내셔널 오페라에서 오페라를 감상할 수도 있다. 그뿐만 아니라 트라팔가르 광장을 굽어보는 내셔널 갤러리(National Gallery)와 내셔널 포트레이트 갤러리(National Portrait Gallery)에서 미술품을 즐길 수도 있다. 내셔널 갤러리에는 16~19세기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보물이 산을 이루는 대영박물관(British Museum)도 충분히 걸어서 오갈 수 있는 거리다. 대영 박물관은 면적이 거의 5만 4600㎥나 되는 광활한 역사‧문화 공간이다. 하도 넓어 자칫 유물을 제대로 감상하지도 못하기 일쑤다. 방대한 전시물을 보노라면 이를 수집한 대영제국의 힘과 이를 잃은 지역 사람들의 상실감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이 때문인지 영국의 국립 박물관과 미술관은 기본 전시에는 입장료가 없다. 대신 입구에 몇 파운드라고 적혀 있는데 이는 입장료가 아니라 이 정도 기부해주면 감사하겠다는 호소문이다. ‘이곳을 계속 무료로 입장하려면 기부하세요’라는 표어가 재미있게 느껴진다. 이집트‧메소포타미아 같은 고대 유물에서 시작해 엘긴 백작이 그리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에서 떼왔다는 그 유명한 엘긴 마블을 비롯한 그리스 유물까지 정말 끝없는 유물의 향연이 펼쳐진다. 인류 문화유산을 한눈에 보기에 이만한 곳이 없다. 중국 문화재도 상당한 규모로 있다.

상황이 이러니 런던을 찾은 사람들은 역사와 문화 현장에서 눈과 귀가 즐겁게 지낸 뒤 차이나타운에서 위장을 행복하게 하는 게 하나의 정규 코스로 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다. 최근에는 차이나타운 인근에 한국 음식점이 늘어나면서 분위기가 더욱 국제화되고 있다. 팬데믹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된 지난해 3월에 웨스트엔드를 방문했더니 다시 사람이 붐비고 있었다. 공연장은 물론이고 차이나타운의 중국 식당에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문화도 맛이 있어야 더욱 기쁘게 즐길 수 있다.

런던 차이나타운은 교통 접근성도 뛰어나다. 지하철 레스터 스퀘어(Leicester Square) 역과 피커딜리 서커스(Piccadilly Circus) 역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다. 코벤트 가든(Covent Garden) 역과 기차역을 겸한 차링 크로스(Charing Cross) 역에서도 걸어서 접근할 수 있다.

레스터 스퀘어 역과 피커딜리 서커스 역에선 트라팔가르 광장(Trafalgar Square)으로 곧바로 걸어갈 수 있다. 광장에는 영국의 영웅인 호레이쇼 넬슨 제독(1758~1805)의 동상이 높은 기둥 위에 우뚝 서 있다. 근처에는 사자상과 분수대가 있어 그야말로 런던 관광의 중심지다. 광장 이름인 트라팔가르는 넬슨 제독이 마지막으로 치렀던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비롯한다.

당시 넬슨은 1805년 해상 봉쇄를 뚫고 영국을 공격하려는 프랑스 나폴레옹 1세 황제(1769~1821)의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를 스페인 서남쪽 트라팔가르 곶 앞바다에서 격퇴하고 자신은 프랑스 소총수의 총에 맞았다. 그러고도 4시간을 계속 전투를 지휘하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임무를 완수했습니다(Thank God. I have done my duty)"라는 말을 남기고 함상에서 숨을 거뒀다.

당시 27척의 영국 함대는 33척의 프랑스‧스페인 함대를 맞아 싸우면서 한 척도 잃지 않았지만, 상대는 22척을 잃었다. 말 그대로 압승이다. 치열한 포격전 속에서 영국은 400명이 전사하고 1200명이 부상했지만, 상대는 3200명이 전사하고 7000명이 포로가 됐으며, 적 사령관 피에르 빌뇌브도 사로잡혔다. 해군력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감한 나폴레옹은 다시는 영국을 침공하려고 시도하지 못했다. 넬슨은 ‘영국의 이순신 장군’이라고 할 수 있는 구국의 영웅이다.

런던 차이나타운에서 샤프츠베리 애비뉴(Schaftsbury Avenue)를 지나면 소호(Soho) 지역이다. 재즈바와 함께 술집, 세계 각국 음식점과 스트립쇼 공연장이 즐비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소호는 『자본론』 저자인 카를 마르크스가 오랫동안 거주하면서 이 책을 쓴 지역이다. 마르크스는 1849년 5월 런던으로 이주해 지금은 시내 중심부가 됐지만, 당시에는 서민 거리였던 소호의 딘 스트리트 28번지 등에서 살았다. 이곳에 가면 마르크스가 살았다는 표식(블루플라크)이 붙어있다. 지금은 1층이 핍쇼장으로 변해있어 아이들과 함께 지나가기가 민망하다. 일부러 찾거나 사진 찍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다.

마르크스는 1883년 3월 14일 런던 북부에서 세상을 떠나 하이게이트 공동묘지에 묻혔다. 이 공동묘지의 마르크스 묘지와 두상은 찾는 사람이 가끔 있다. 그 앞에 ‘It’s time to call Marx. 일하는 사람들‘이라고 영어와 한글로 적힌 추모문이 붙어있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다. 묘지와 두상을 보려면 근처에 이를 관리한다면서 자리 잡은 사람들이 2파운드를 요구하는데 주지 않으면 피곤해진다.

마르크스는 대영박물관 부속 시설이던 대영도서관(지금은 세인트 판크라스 역 인근에 새로 지어서 옮겼다)을 무료로 도서관을 이용하면서 『자본론』을 썼다. 런던에 잠시 망명했던 레닌도 이 도서관을 이용했다. 매년 마르크스의 생일인 5월 5일 무렵에는 피커딜리 서커스 역 1번 출구 앞에서 모여 마르크스의 런던에서의 족적을 살피는 걷기 투어가 진행되기도 한다. 런던은 외국인을 비교적 관대하게 받아 자신들의 문화로 녹여왔다.

이러한 개방성과 관용은 제국이 성장하는 특징이다. 폐쇄성과 배타성은 몰락의 징조다. 문을 활짝 열고 사람과 지식, 문화를 받아들인 덕분에 런던은 거대한 역사의 흔적을 남기고 문화 공존의 이점을 지금도 얻고 있다. 런던 차이나타운은 그 강력한 증거다.

채인택 국제 저널리스트

더차이나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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