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 굽어가며 쓴 논문…92세 최고령 박사 "정신연령은 어려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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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성공회대 일반대학원에는 특별한 졸업생이 있다. 지난 5년간 석·박사과정을 모두 이수하고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상숙(92) 선생이 그 주인공이다. 오는 16일 졸업식을 앞둔 이 선생을 8일 서울 항동 성공회대에서 만났다. 그는 한국에선 역대 최고령 박사 학위 취득자다.

이 선생에게 졸업을 앞둔 소회를 먼저 물었더니 “내가 최고령 박사라고들 주변에서 말하지만, 특별히 내 나이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이 나이에도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걸 남들이 인정해주고, 도와주고, 격려해준 데 대해 감사할 뿐”이라고 답이 돌아왔다. 87세에 대학원 정규과정을 시작한 그는 “나이가 많은데 어떻게 공부를 할 수 있겠냐고 걱정한 사람이 더러 있었다”면서도 “하지만 난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편”이라며 미소지었다.

국내 최고령 사회학 박사인 이상숙씨가 8일 박사복을 입고 서울 구로구 성공회대학교 승연관 앞에 섰다. 김현동 기자

국내 최고령 사회학 박사인 이상숙씨가 8일 박사복을 입고 서울 구로구 성공회대학교 승연관 앞에 섰다. 김현동 기자

1931년생인 이상숙 선생은 61년 숙명여대 가정학과를 졸업한 뒤 국립서울모자원 수예 교사로 일했다. 65년엔 완구제조·수출업체 ㈜소예를 창업, 30년간 대표이사 사장·회장으로 경영하면서 대통령표창·석탑산업훈장을 수상했다. 이밖에 87~93년 여성경제인협회장, 90~96년 숙명여대 총동문회장, 2000~2010년 한국기독실업인회(CBMC) 부회장, 2011~2017년 쥬빌리통일구국기도회 상임위원장을 지내는 등 대외활동에도 힘썼다.

쥬빌리통일구국기도회 상임위원장 임기를 마치고 후임자에 업무인계를 하는 중 이 선생은 가족과 식사하는 자리에서 “다 끝나면 사회학 공부를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중소기업 경영자 모임에서 종종 강연자로 초빙했던 사회학 교수들이 궁금한 점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내놓는 모습을 흠모해 왔던 터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회학 박사과정은 꿈도 꾸지 않았지만, 며칠 뒤 딸이 밥을 같이 먹자며 데려간 곳이 성공회대였다.

평소 유튜브로 고(故) 신영복 선생의 강연을 즐겨 보던 딸이 사회학 공부를 하고 싶다는 어머니를 신영복 선생이 교수로 몸담던 학교로 안내했다고 한다. 그날은 마침 대학원 원서접수 마감일이었다. ‘원서 마감이 1시간 남았다’는 대학 관계자의 말에 두 모녀는 옆 건물 컴퓨터실로 들어가 함께 원서를 작성하고 접수했다. 닷새 뒤 구술면접을 대비해 사회학개론 등 사회학 입문 서적 세 권을 사서 외다시피 했다. 면접 때 전공 관련 질문은 없었지만 “저는 일을 맡으면 꽤 열심히 하는 사람입니다”라는 만학도의 당찬 답변에 교수들은 합격점을 줬다.

서울 광진구에서 구로구까지 동서를 가로지르는 등하굣길만 빼면 대학원 생활 적응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첫 학기 ‘소수자 연구’라는 수업에서 “내가 유일한 소수자니까 잘 봐달라”고 농담 섞인 자기소개를 했더니 오히려 젊은 동급생들이 “상숙쌤”이라고 부르며 먼저 다가와줬다. 이 선생은 “젊은이들 모임에 매번 따라가는 건 힘들었지만, 가끔은 모여서 음식도 해먹고 기타 치고 노래도 부르면서 어울렸다”며 “내가 정신연령이 좀 낮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국내 최고령 사회학 박사인 이상숙씨가 8일 서울 성공회대학교 승연관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면서 5년간의 대학원 생활을 회상하며 웃고 있다 .김현동 기자

국내 최고령 사회학 박사인 이상숙씨가 8일 서울 성공회대학교 승연관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면서 5년간의 대학원 생활을 회상하며 웃고 있다 .김현동 기자

하지만 젊은 동급생들의 학업 속도를 따라가는 건 여간 힘들지 않았다. 이 선생은 석사과정 중에는 학교 앞에 작은 공부방을, 박사과정 땐 학교 기숙사에 이용료를 지불하고 방 하나를 얻어 그곳에서 책과 씨름했다. 박사과정 마지막 1년엔 박사학위 논문을 쓰느라 컴퓨터 앞에만 앉아 하루를 보내기도 일쑤였다. 구순이 넘도록 꼿꼿했던 고개와 어깨가 논문을 쓰면서 점점 굽어갔다. 종합시험과 영어시험도 고역이었다. 하지만 한 차례의 결석도, 빠뜨린 과제도 없이 개근한 덕에 성적은 늘 우수한 편이었다고 대학 관계자는 전했다.

이 선생이 사회학을 택한 이유는 국내, 남북한, 국제사회의 극단적 이념 갈등의 해법을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조그마한 나라에서 둘로 나뉘어서 서로 원수인양 싸우는 건 백해무익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고 했다. 이를 위해 자신의 신앙이자 대외활동의 원천이었던 기독교를 사회학적으로 탐구하고자 했다. 이 선생은 “인간 예수를 소개하면서 그가 어떻게 하나님께 헌신하고 순종했느냐, 그게 사회학적으로는 어떤 의미를 갖느냐를 연구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유토피아적 전체주의에 사로잡힌 이는 유토피아적 전체주의에 의해 벌어지는 폭력을 보지 못한다. 전체주의적 악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은 ‘나는 나다’라는, 자기정체성의 감옥을 깨고 나오는 것”이라며 “십자가에 못박히면서도 자신을 손가락질 하는 이들의 용서를 빌었던 예수의 ‘혁명적 순종’이 바로 그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박사논문 「인간 예수의 ‘혁명적 순종’이 갖는 정치 윤리와 레비나스의 케노시스론」에 이러한 자신의 주장과 논거를 자세히 담았다.

이 선생에게 졸업 후 계획을 물었더니 “나는 사회학 공부를 포함해 내가 뭔가를 하고자 결심하고 한 적이 없다”며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할 일을 주실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당장 오는 25일에 학회에서 자신의 연구 결과를 발표한다는 그는 “박사학위 논문을 쓰면서 함께 연구해보고 싶었던 내용을 분량이 너무 많아 떼어놓았다” 며 “당분간은 이 내용을 바탕으로 책을 쓰면서 지낼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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