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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상렬의 시시각각

'빅 배스'<Big Bath>의 소멸시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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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상렬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이상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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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방비 폭탄 속 대통령 지지 하락 #전 정권의 실책 수면 위로 부상 중 #수습할 책임은 그래도 현 정부에

난방비 폭탄의 책임에 대해 국민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응답자의 정치 성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여론조사가 실마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설 연휴 직후인 지난달 25~27일 리얼미터 조사에선 윤석열 대통령 국정 수행에 대한 긍정평가가 전주보다 1.7%포인트 떨어진 37%로 나왔다. 지난달 31일~이달 2일 한국갤럽 조사에선 긍정평가가 34%로 직전 조사(1월 3주 차)보다 2%포인트 하락했다. 부정평가는 56%였다. 부정평가 이유로 경제·민생·물가를 꼽은 이가 가장 많았다(15%). 설 연휴 전후 이슈가 된 난방비 폭탄 때문이란 분석이 제기됐다. 조사에서 난방비 급등 책임이 어느 정권에 있는지를 직접 물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국민이 정부 대처에 불만을 표출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윤 정부는 억울할 만하다. 작년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가스 연료인 액화천연가스(LNG) 수입 가격이 폭등했다. 그걸 가스 가격에 제대로 반영하지 못해 가스공사 손실이 급증했다. 문재인 정부가 탈원전으로 LNG 사용을 잔뜩 늘린 것이 문제를 키웠다. 게다가 문 정부는 2021년 3월 이후 국제가격이 뛰는데도 정권 말까지 요금을 동결했다. 대선 뒤인 작년 4월에야 가스요금 인상이 시작돼 네 차례에 걸쳐 38%나 올랐다. 그 결과가 역대급 혹한 속에 난방비 폭탄으로 닥친 것이다. 전쟁과 날씨야 어쩔 수 없다 쳐도 문 정부가 가스요금을 적시에 올리기만 했어도 난방비 체감도는 지금과 사뭇 달랐을 것이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교체된 정권의 첫해엔 이런 일이 늘 있다. 전 정권 실정의 결과가 현 정권으로 넘어온다. 그래서 쓰는 정책이 ‘빅 배스(Big Bath)'다. ‘목욕으로 때를 씻어낸다’는 의미인데, 새로운 정권이나 경영진이 과거의 부실을 임기 첫해에 모두 공개하는 것을 가리킨다. 실적 부진의 책임은 전임자에게 넘기고 어려운 상황에서 이룬 자신의 업적을 부각하려는 포석이다. 외환위기 속에 집권한 김대중 정부 시기엔 “금고가 비었다”는 언급만으로도 빅 배스 효과가 났다. 환란의 원인을 밝혀야 한다며 경제청문회도 했다. 박근혜 정부는 임기 첫해 성장률 전망치를 시중 예상보다 낮춰 잡는 쇼크 요법을 택했다. 이명박 정부로부터 넘겨받은 경제 형편이 어렵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탄핵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는 적폐 청산의 깃발을 올렸다. 서슬퍼런 분위기에서 소득주도성장, 탈원전, 법인세 인상(최고세율 22%→25%) 등 비상식적인 정책들이 강행됐다.
 윤 정부의 빅 배스는 어정쩡했다. 탈원전에 치우친 부실 에너지 정책이 초래한 공기업 적자가 얼마인지, 민생이 어떤 청구서를 받아들게 될지 국민에게 알리고 이해를 구하는 절차가 미흡했다. 순진하거나 요령부득이었다. 문 정부의 포퓰리즘은 깊은 후유증을 남겼다. 빚을 내 돈을 왕창 푸는 바람에 국가채무가 약 400조원 증가했다. 정작 해야 할 일은 안 했다. 올려야 할 공공요금을 묶어둔 게 단적인 사례다. 그로 인해 에너지 공기업이 부실기업으로 탈바꿈했다. 작년 한전 적자가 30조원, 가스공사 미수금(요금으로 회수하지 못한 손실)이 9조원이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윤 정부의 공공요금 인상은 비정상의 정상화 과정이다. 다만 포퓰리즘의 마취가 풀리면서 덮쳐 오는 고통은 다른 문제다. 가스요금 인상은 불가피했지만, 엄동설한의 서민과 취약층에게 줄 영향을 더 엄밀하게 따져 미리 대책을 내놓았어야 했다. 민심의 분노는 거기서 비롯된다.
 대개 빅 배스는 임기 초반에 이뤄진다. 뒤늦게 할수록 국민 눈엔 책임 떠넘기기로 비쳐 반감만 사기 십상이다. 일종의 소멸시효가 있는 셈이다. 에너지 정책을 비롯해 국방, 연금, 노동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전 정권 실책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중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전 정권 탓만 할 수는 없다. 이제부터는 윤석열 정부의 책임이다. 그렇게 받아들이는 자세여야 성공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