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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성희의 퍼스펙티브

'섹시하고 예쁜 몸' 자랑 아니다…요즘 '맨몸 예능' 뜨는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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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육체 예능 전성시대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바야흐로 몸의 시대. 잘 관리된 몸이 그 사람을 말해주는 시대다. TV와 OTT 예능도 ‘몸’이 접수했다. 장르 불문이다. 지난달 시즌2가 끝난 넷플릭스 ‘솔로지옥’ 등 연애 예능은 핫바디들의 향연이다. 이름과 나이, 직업을 숨긴 첫 만남부터 몸에 집중한다. 몸이 좋은 헬스 트레이너, 균형 잡힌 댄서 등이 인기 출연자다. 카메라는 헐벗은 몸을 전시한다. 해안가나 휴양지에 합숙소를 얻고 수영복 차림으로 미션을 수행한다. 출연자들이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고, 시청자의 관음적 욕망도 충족시킨다.

지난해 신드롬급 인기를 얻은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m.net)는 춤을 통해 몸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최근에는 아예 맨몸으로 부딪히는 육체예능이 인기다. 근육질 남녀 100명이 성별·체급·나이를 불문하고 오직 맨몸만으로 대결해 최고의 몸을 뽑는 넷플릭스의 서바이벌 예능 ‘피지컬: 100’(MBC 제작)이 그 중심에 있다.

‘피지컬: 100’ ‘오버 더 톱’ 등 인기
드라마 이어 K콘텐트 새 길 열어

근육질 출연진의 서바이벌 게임
“나는 내가 지켜야” 불황사회 반영

자기 과시하는 SNS 열풍도 한몫
사회적 좌절감이 몸 투자로 연결

드라마 ‘오징어 게임’ 속편 보는 듯

양성희 퍼스펙티브

양성희 퍼스펙티브

‘피지컬: 100’은 스켈레톤 국가대표 윤성빈, 체조 국가대표 양학선, 격투기 선수 추성훈 등 ‘한 몸’ 하는 출연자들의 라인업부터 화려하다. 국내의 핫한 반응에 이어 글로벌 시청자들에게도 확실하게 눈도장을 찍었다. 공개와 동시에 넷플릭스 비영어권 시리즈 TOP 10, 세계 33개국 TOP 10에 올랐다. 근육맨들의 피 튀기는 서바이벌이라는 점에서 ‘오징어 게임’을 빗댄 ‘근징어 게임’이란 별칭도 얻었다.

이 프로를 즐겨본다는 방탄소년단 정국 효과도 봤다. 지난 3일 정국이 팬 플랫폼 위버스의 라이브 방송에서 ‘피지컬: 100’을 시청하는 장면은 전 세계 동시 접속자가 1000만 명에 달했다. 그간 넷플릭스에서 ‘오징어 게임’ ‘지금 우리 학교는’ ‘더 글로리’ 등 K드라마가 약진한 데 반해, K예능은 큰 성과를 내지 못했던 터라 K콘텐트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주목받는다.

우락부락한 출연진의 외모에서부터 승패가 빤해 보였지만 이변이 속출하는 게 포인트다. 운동이 아닌 직업으로 생활근육을 키운 산악구조 요원이 오래 매달리기에서 1등을 하고, 몸이 날쌘 체대생이 ‘덩치남’을 물리치는 식이다. 공 뺏기(순발력·근력), 오래 매달리기(밸런스) 등 다양한 신체 능력을 측정할 수 있도록 게임을 구성한 결과다.

국내 서바이벌 특유의 ‘악마의 편집’이나 빌런(악당) 캐릭터, 예능형 자막도 없다. 오직 몸에 집중해 특수 카메라로 부풀어 오르는 근육, 튀는 땀방울을 잡아낸다. 만국 공통어인 ‘몸의 언어’로 글로벌 시청자를 사로잡겠다는 취지다. “지구 반대편 할머니 할아버지도 즐길 예능을 만들겠다”는 장호기 PD(MBC 시사교양국)는 “한국에서 시즌 2, 나중에는 전 세계 대륙별로 참가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발전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몸 앞에선 남녀 구별도 없다. 동등한 자격으로 혼성 대결도 펼쳐지는데 몸을 부딪치는 과정에서 일부 선 넘은 장면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인터넷에서는 일부 여자 출연자에 대한 성희롱성 악플이 쏟아지기도 한다. 제작진의 섬세한 고려와 장치가 아쉬운 대목이다.

맨몸의 파이터들, ‘근부자’의 탄생

사실 일반인들의 몸만들기는 전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코로나 시국은 ‘홈트’ 열풍까지 불러왔다. 1990년대 KBS ‘출발 드림팀’을 필두로 한 TV 운동 예능의 역사도 오래다. 명절 간판 프로 ‘아이돌 육상대회’(MBC)는 운동 잘하는 아이돌들이 단박에 주목받을 수 있어 소속사들이 특훈을 시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미모의 여자 연예인들이 축구의 거친 몸싸움을 불사하는 ‘골때리는 그녀들’(SBS)은 전통적 여성상을 비튼다. ‘맛있는 녀석들’(코미디TV) 스핀오프로 시작한 웹 예능 ‘오늘부터 운동뚱’은 뚱뚱하고 식성 좋은 여자 개그맨 김민경을 ‘근(육)부자’ 스포츠 천재로 새로 태어나게 했다. 김민경은 사격 국가대표 선수로까지 발탁됐다.

기존 운동 예능들이 구기 종목에 집중됐다면 ‘피지컬: 100’은 맨몸 대결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지난달 종영한 JTBC ‘오버 더 톱-맨즈 챔피언십’ 역시 맨몸 운동인 팔씨름을 TV로 옮겨왔다. ENA ‘씨름의 제왕’, 인플루언서나 보디빌더 등이 서로 몸값을 매기는 웨이브의 ‘배틀그램’도 있다.

심지어 여자 아이돌들도 바람 불면 날아갈 듯 연약한 몸보다 근육 있는 건강한 몸들이 선호된다. 발레리나 출신의 카즈하 등이 멤버인 걸그룹 르세라핌은 팬들 사이에서 ‘근세라핌’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인간의 몸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피지컬: 100’ 첫 회는 “인간의 몸은 거짓을 얘기하지 않는다. 스스로 쓴 역사이자 그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몸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인간의 노력을 강조하는 말이다. 동시에 몸이야말로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최후의 지대’란 의미도 있다.

특히 젊은층을 중심으로 한 ‘몸만들기’ 열풍은 부동산 가격 폭등이나 취업난 등으로 인한 사회경제적 무력감에, 내가 노력한 만큼 결과를 볼 수 있는 내 몸에 대한 투자로 맞대응하려는 전략으로 보이기도 한다. 맨몸의 육체 예능은 그저 섹시하고 예쁜 몸, 보기 좋은 몸이 아니라 강한 몸, 힘센 몸, 끝까지 살아남는 몸을 보여준다. 전 지구적 기후위기나 잇따르는 안전사고 등 사회적 위기감, 불안감의 증폭 속에서 몸의 단련으로 나는 내가 지킨다는 ‘자구력’ ‘생존능력’에 대한 관심도 읽힌다.

내 몸을 내가 가꾸고, 내 몸에 내가 매료되며, 내 몸을 내가 사랑하는 것은 동시에 대중문화계 트렌드의 하나인 ‘나(me) 지상주의’ ‘나르시시즘’과도 연관 있다. 더욱 결정적 요인은 눈으로 보이는 것을 자랑하고 과시하는 인스타그램 등 SNS다. 가장 손쉽게 타인의 인정과 감탄을 자아낼 수 있는 콘텐트의 하나가 바로 몸이다. 책 『좋아요, 구독, 알림설정까지』는 인스타그램 시대 인플루언서의 3대 유형의 하나로 몸으로 인정투쟁하는 ‘육체파’를 꼽았다.

공영방송 MBC와 BBC의 다른 선택

‘피지컬: 100’은 지상파가 넷플릭스 오리지널을 제작해 성과를 낸 첫 사례로도 눈길을 끈다. 지상파마저 OTT에 납품하는 콘텐트 제작사로 위상 전환을 상징하는 프로다. 심의와 규제가 까다로운 지상파 대신 OTT, 그것도 넷플릭스 대항마로 출범한 지상파 연합 OTT인 웨이브 아닌 넷플릭스를 택했다.

사실 지상파 방송사들의 스튜디오 시스템으로의 변신은 예견된 것이고 지상파 위기 상황에서 다양한 생존 전략은 당연하지만 3년 전만 해도 박성제 사장이 나서서 “MBC도 수신료를 받아야 한다”며 공영방송 기치를 내걸었던 것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다.

문화평론가 성상민은 한 칼럼에서 공영방송의 생존 노력은 중요하지만, 생존 이상으로 공영방송을 생각하지 못한다면 문제라고 꼬집었다. “체력대결 예능은 영국 BBC, 일본 NHK, 독일 ZDF 등의 공영방송에서는 시도하지 않던 포맷인데, 과연 이들이 이런 포맷이 화제가 될 것을 모르고 도전하지 않은 것일까. (몸을 다루더라도) NHK는 꾸준히 장애인 운동에 관심을 기울이며, 정기적으로 장애인의 일상 운동에 대한 프로그램을 제작한다. 생존을 이유로 공영성에 대한 고민을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프로그램의 시도가 반복될수록 ‘공영방송 무용론’이 더욱 강화되지 않을까.” 공영방송은 생존 전략도 공영성·공공성에 입각해야 한다는 얘기다.

사실 MBC는 이미 과도한 정치적 편향성으로 정치적 중립성, 정치적 독립성이라는 공영방송의 본분을 저버렸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역시 넷플릭스 추격, 공영방송의 위기로 고민하는 영국 BBC는 넷플릭스와 손잡고 드라마 시리즈 ‘드라큘라’를 제작하는 한편, 지난 2021년 넷플릭스와 ‘장애인 창작자들의 작품 발굴 및 공동 제작을 위한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향후 5년간 장애인 창작자들의 작품을 발굴하고 스토리를 개발하며 장애라는 주제가 TV의 주류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재정적 지원을 약속한 것이다. 건강한 몸들이 에너지를 뿜어내는 MBC의 ‘피지컬: 100’과는 다른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