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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 앞에 하나 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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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강혜란 기자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강혜란 국제부장

강혜란 국제부장

허망한 표정의 아버지는 숨진 딸의 손가락을 차마 놓지 못하고 있다. 대지진으로 형체 없이 무너진 건물 잔해 속 튀르키예 촌부의 사진을 보고 있자니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가 떠올랐다. 불과 이틀 전 다녀온 아오모리현 작은 바닷가 마을이 쓰나미로 산산이 부서진 사진을 봤다. 천운이었다는 안도감은 잠깐, 미소 띤 얼굴로 정갈한 안주를 내주던 주점 주인이 무사할까 염려됐다. 이번 지진이 유독 쓰라린 것도 이미 1만 명을 넘어선 희생자 때문만은 아니다. ‘형제의 나라’라는 관용어를 떠나서, 수년 전 이스탄불 등을 여행한 기억이 새록새록 겹쳐서다. 귀화한 저널리스트 알파고 시나씨 같은 한국 사회 속 튀르키예인의 존재감도 작용했다. 오랫동안 튀르키예 리그에서 뛰었던 배구선수 김연경의 심정은 오죽하겠는가.

규모 7.8의 강진이 덮친 튀르키예 남부 카라만마라슈에서 건물 잔해에 깔려 숨진 15세 딸의 손을 살아남은 아버지가 놓지 못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규모 7.8의 강진이 덮친 튀르키예 남부 카라만마라슈에서 건물 잔해에 깔려 숨진 15세 딸의 손을 살아남은 아버지가 놓지 못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이 없었다면 영장류 중에서도 가장 연약한 호모 사피엔스가 21세기까지 살아남지 못했을지 모른다. 원시 인간의 뼈가 다쳤다가 아문 흔적의 화석은 누군가 그의 생존을 책임졌음을 증명한다. 재난과 고통이 인간의 연민을 자극해 협동심을 북돋운다는 것은 진화사회학의 정설이다. 우리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누군가와 공동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함께 일할 수 있고, 그걸 통해 사회·민족·국가 하다못해 ‘팬덤’ 같은 무형의 공동체를 만들어낼 수 있다.

다만 이 같은 능력은 이질적인 공동체에 대한 적대감과 동전의 양면이다.

아기를 분만할 때 엄마에게 솟구치는 옥시토신은 누군가 자기 아기를 위협한다고 느낄 때 분노를 뿜어내게도 한다. 이것이 확장되면 ‘우리’에게 해를 끼친 자와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게 된다. 우크라이나 전쟁 1년을 앞두고 본지 기자가 현지에서 보내온 르포도 그랬다. 침략을 자행한 러시아야 말할 것도 없고 인접국 벨라루스가 ‘침공 루트’를 터줬다는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원한과 비극의 대물림이다.

인류가 이렇게 이어졌으면 오늘날 우리 문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적자생존이라지만 실은 친화력이 진화를 촉진했고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고 최근의 진화인류학자들은 말한다. 이를 입증하기라도 하듯 국제사회의 구호 손길이 쏟아지고 있다. 한국은 물론이요, 최근까지 나토 가입을 두고 튀르키예와 갈등을 빚은 스웨덴 등도 동참했다. 특히 한·일 관계 못지않은 ‘에게해의 앙숙’ 그리스는 1999년 연쇄 지진 때 양국 간의 화해를 싹 틔운 ‘지진 외교’를 이번에도 가동했다. 위협에 대한 불안이 없을 때 접촉이 서로에 대한 이해를 가장 북돋운다고 한다. 재난 앞에 인간은 평등하다. 이 겸허함이 우리를 하나로 잇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