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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확증편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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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박형수 기자 중앙일보 기자
박형수 국제부 기자

박형수 국제부 기자

# 분수대 옆에 선 남녀. 격앙된 분위기 속에 대화를 나누는가 싶더니 갑자기 여자가 옷을 훌훌 벗어 속옷 바람으로 물속에 뛰어든다. 멀리서 이 장면을 지켜보는 소녀. 여자의 어린 동생이다. 소녀는 남자가 언니를 괴롭혀 곤란한 지경으로 몰고 간 것이라 오해한다.

이언 매큐언의 소설 『어톤먼트』의 한 장면으로, 여기서 모든 갈등이 출발한다. 소설은 ‘속죄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서, 잘못된 행동에 이르는 첫 단계가 ‘무지로 인한 오해’와 ‘확증편향’임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소녀의 작은 오해는 주변 정보를 왜곡한다. 남자가 “언니에게 전해달라”며 건넨 편지에 적힌 음담패설, 서재에서 목격한 남자와 언니의 애정행각 등을 오해의 프리즘으로 바라보며 그를 범죄자로 결론 내린다. 결국 남자에게 강간범이란 누명을 씌워 감옥과 전쟁터로 내몬다. ‘옳은 일’이라 믿으면서.

진실은 뭘까. 언니와 남자는 사랑하는 사이였고, 소녀의 행동이 두 사람을 파멸로 몰아넣었다는 거다. 소설가를 꿈꿨던 소녀는 진실과 직면한 뒤 간호사로 일하며 속죄의 글을 쓴다.

소녀를 극단적 행동으로 몰고 간 확증편향은 심리학 용어다.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골라 믿고 반대되는 정보는 외면한 채 아집을 키워가는 현상이다. 확증편향에서 비롯된 오해를 검증 없이 신념으로 삼을 때 죄의식 없이 잘못된 행동을 저지를 수 있다고 소설은 경고한다.

심리학자들은 자신의 믿음에 시간·돈·노력을 많이 투입할수록 확증편향이 강해진다고 설명한다. 오래도록 정성을 쏟으며 지켜온 믿음일수록 오류를 인정하기 어렵고 결국 끝까지 밀어붙이게 된단 얘기다.

지난 3일, 법원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에 대한 1심 공판에서 징역 2년을 선고하며 “죄질이 불량하고 죄책이 무겁다”고 양형 사유를 밝혔다. 특히 “객관적 증거에 반하는 주장을 하며 자신의 잘못에 눈을 감은 채 반성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꾸짖었다.

하지만 조 전 장관은 “많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면서 항소할 뜻을 밝혔고, 그가 저지른 입시 비리의 수혜자인 딸은 유튜브에 등장해 “떳떳하다”며 웃었다. 법의 판결에도 뉘우침이 없는 부녀의 모습은 그들이 얼마나 오래도록 잘못된 믿음에 충실했을지, 그 과거를 짐작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