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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서 주목받는 김택상 "내 그림은 물과 바람, 빛의 합작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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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상, 공명-23-1 , 2023 Water, acrylic on canvas, 123 x 129 cm. [사진 리만머핀]

김택상, 공명-23-1 , 2023 Water, acrylic on canvas, 123 x 129 cm. [사진 리만머핀]

서울 한남동 리만머핀 서울 갤러리에 미국 작가 헬렌 파시지안(88)의 조각과 국내 김택상(64) 작가의 그림이 나란히 전시됐다. 전시 제목은 '반사와 굴절(Reflections and Refractions). '빛'을 주제로 각기 독창적인 작업을 해온 두 작가를 함께 소개하는 자리다. 이 전시는 개막 전부터 또 다른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2017년 한국에 진출한 글로벌 갤러리가 최근 한국 작가를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리만머핀은 서울 외에도 뉴욕, 홍콩, 런던에 거점을 두고 있다. 국내 리안갤러리를 통해 탄탄한 팬층을 확보해온 국내 중견 작가가 이번 전시를 통해 외연을 얼마나 확장할지 기대를 모은다.

리만머핀 서울, '반사와 굴절' #미 헬렌 파시지안과 2인전 #수채화 캔버스에 아크릴 #물과 빛이 일렁이는 화면

포스트 단색화의 주요 작가로 주목받는 김택상의 그림은 맑고 투명한 색채, 은은하게 빛을 뿜어내는 화면이 특징이다. 캔버스에 아크릴 서양화 재료로 작업하지만, 마치 한지에 스며든 물감처럼 부드럽고, 깊이 있는 공간감이 두드러진다. 작가에 따르면 이것은 "중력과 바람, 빛이 함께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물과 빛을 머금은 캔버스  

리만머핀 서울 전시장 전경. [사진 리만머핀]

리만머핀 서울 전시장 전경. [사진 리만머핀]

김택상,Dim memories-23-2 , 2023 Water, acrylic on canvas,79.5 x 81.5 cm[사진 리만머핀]

김택상,Dim memories-23-2 , 2023 Water, acrylic on canvas,79.5 x 81.5 cm[사진 리만머핀]

전시장에서 만난 김 작가는 "30년 간 몸담았던 학교를 떠나고 최근 3년 동안 작품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며 "요즘 제가 느끼는 자유로움이 작품에 그대로 묻어나고 있다. 드디어 제 본성을 찾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에 그 변화의 흔적이 모두 담겼다는 얘기다.

그런 가운데 변하지 않은 소재는 그에게 꾸준히 영감을 준 물과 빛이다. 대표 시리즈인 '숨빛(Breathing Light)'부터 신작 '공명(Resonance)' '오로라(Aurora) 등 20여 점은 그에게 물과 빛, 시간으로 단단하게 쌓아 올린 공간과 같다.

이번 전시에 가장 주목할 것은 '공명' 연작이다. 기존 '숨빛' 연작이 잔잔한 호수의 표면 같았다면, '공명'은 산들바람에 일렁이는 수면을 연상케 한다. 밝은 분홍과 맑은 파랑이 잔잔하게 엇갈리며 흔들리며 빛을 낸다. 미묘한 푸른색과 녹색이 엇갈린 '오로라'도 눈길을 끈다.

김 작가는 "항상 결과를 모르는 채 시작하는 작업이 설렘을 선사한다"며 "순간순간 몰입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작업을 지속하게 하는 힘"이라고 말했다.

붓을 내려놓았다 

자신의 그림 앞에 선 화가 김택상. [사진 리만머핀]

자신의 그림 앞에 선 화가 김택상. [사진 리만머핀]

김택상,Somewhere over the rainbow 23-1, 2023, Water, acrylic on canvas,121.5 x 127 cm[사진 리만머핀]

김택상,Somewhere over the rainbow 23-1, 2023, Water, acrylic on canvas,121.5 x 127 cm[사진 리만머핀]

그에게 어떤 붓을 쓰느냐고 물으니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붓을 쓰지 않고 그림을 그린다"는 것. "학창 시절 별명이 '데생'일 정도로 드로잉 실력이 좋았지만 물을 표현하려고 하다 보니 제가 그리는 방법으로는 도저히 그 느낌이 나오지 않았다. 어느 순간 붓을 내려놓고 물이 그림을 그리게 했다."

작업은 이런 식이다. 아크릴 안료를 풀어 녹인 용액을 캔버스 위에 가득 붓고, 희석된 입자가 캔버스 표면 위로 가라앉기를 기다린다. 캔버스에 얇게 색이 쌓이면 남은 물을 빼내어 말린다. 그는 "캔버스 표면이 '빛이 숨 쉬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같은 과정을 수십 번 반복한다"고 했다.

보살핌의 미학  

매일 물을 빼고 말리며 반복하는 과정을 그는 '보살핌의 미학'이란 말로 요약했다. "이 일은 마치 농부가 작물을 재배하는 과정과 같다. 이미 작물은 그 씨앗에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지 않나. 농부는 오래 견디고 기다리며 보살필 뿐이다." 그는 "그림 하나 완성되는 데 수 개월 걸린다"며 "이 일은 장 담그는 것과 같기도 하다. 세월의 맛을 계속 쌓아나가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재료도 중요하다. "처음부터 유화의 반들반들한 느낌이 싫어 처음엔 한지에, 그다음엔 광목에 시도해봤다"는 그는 "이후 오랫동안 일본에서 생산되는 수채화용 캔버스를 써오다 최근 국내 섬유 전문가가 개발한 캔버스를 쓰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왜 그의 그림에선 빛이 스며 나오는 느낌일까. 그는 "시간이 만들어낸 사이 공간 덕분"이라고 설명한다. "색을 앉히고 말리는 과정에서 표면에 시차를 두고 만들어진 수많은 미세한 사이 공간이 빛의 산란 효과를 낸다"는 것이다. 작업 초반에는 그 자신도 원리를 몰랐던 효과다.

"한국 문화의 맥락에서 보아야"
최근 몇 년 동안 그의 작품을 구매하는 해외 컬렉터가 하나둘 늘면서 그의 작품을 어떤 맥락에서 볼지에 대한 논의도 많아졌다. 그는 "제 그림은 서양에서 말하는 '모노크롬 페인팅'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제 작업을 이야기하려면 제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작업 과정을 거쳤는지 맥락을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며 "제 작업은 미니멀도, 모로크롬 회화도 아니다. 굳이 범주화한다면 오히려 단색화"라고 말했다. 이 작업의 뿌리는 한국인의 DNA에 있다는 얘기다. "'고려 불화'는 종이 뒷면에 색을 칠해 은은한 느낌이 앞으로 배어 나오게 하는 '배채법(背彩法)'을 활용했고, 고려청자의 '비색(翡色)' 역시 여러 번 쌓아서 낸 고운 빛깔"이라며 "내가 일부러 '한국성'을 찾기 위해 작업한 것은 아니지만 한국의 전통 미술, 의복, 건축 곳곳에 한국 특유의 정서와 미감이 녹아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동안 서양 문화권에서 제시한 프레임에 우리를 끼워 맞출 것이 아니라 이제는 우리가 제시해야 한다"며 "제 작업도 서양에서 제시한 프레임이 아니라 우리 문화의 맥락에서 읽히고, 세계 미술사에 기여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시는 3월 1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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