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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석의 용과 천리마] 김일성 가문의 유언, “중국을 믿지 말라”

중앙일보

입력

1972년 2월 미국 닉슨 대통령 방중 [중앙DB]

1972년 2월 미국 닉슨 대통령 방중 [중앙DB]

중국을 믿지 말라.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북한 최고지도자의 유언이다. ‘혈맹’이니 ‘형제’ 등을 말할 때는 언제이고, 결국은 중국을 믿지 말라니 아이러니다. 북한은 중국이 자신의 국익에 따라 북한을 포기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 기원은 닉슨의 중국 방문(1972년 2월)미‧중 수교(1979년 1월)다. ‘닉슨 쇼크’는 한국‧일본뿐 아니라 북한에도 쇼크 그 자체였다. 오죽했으면 김일성은 닉슨이 방중한 뒤 1972년에 이례적으로 두 번씩이나 베이징을 찾았을까. 김일성은 보통 1년에 한 번 중국을 찾았다. 하지만 그때는 달랐다. 저우언라이가 이미 1972년 3월 평양을 방문해 닉슨 방중에 관한 결과를 설명했다. 한데 그것만으로 부족했는지 1972년 8월과 10월 두 달 간격으로 베이징을 찾았다. 게다가 1972년 10월에는 베이징을 방문할 때 항상 접견했던 마오쩌둥을 만나지 못하고 저우언라이만 만났다.

당시 중국의 상황은 이렇다. 중국은 1960년대 말이 되면서 미국보다 소련이 더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소련과의 팽팽한 이데올로기 싸움 이외에 1968년 8월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브레즈네프 독트린 등이 중‧소 분쟁을 악화시켰다. 브레즈네프 독트린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의 국내 문제에 개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브레즈네프가 1968년 11월 개혁‧개방을 표방하면서 소련의 영향권에서 이탈하려는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침공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었다.

또한 1969년 3월 중‧소 국경의 우수리강에 있는 섬인 전바오다오(珍寶島)에서 양국이 무력 충돌까지 벌어져 전쟁 일보 직전까지 치달았다. 설상가상으로 소련이 중국의 핵 시설에 선제공격할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이러한 상황이 중국 지도자들에게 미국과의 화해를 고민하게 하였다.

먼저 옆구리를 찌른 사람은 닉슨이었다. 닉슨은 1969년 취임 직후 모스크바를 약화하는 방법으로 대중 정책의 변화를 모색했다. 그는 그동안 희망을 걸었던 폴란드 바르샤바 주재 양국 대사를 통한 접촉에 미련을 버렸다. 1954년 이래 134번의 회의가 있었는데 단 하나의 주목할 업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70년 10월 백악관을 방문한 야히아 칸 파키스탄 대통령에게 워싱턴이 베이징과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고 싶다고 얘기했다. 야히아 칸은 그해 11월 베이징을 방문해 저우언라이에게 닉슨의 뜻을 전달했다. 저우언라이도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렇게 시작한 닉슨의 방중은 ‘007 작전’을 방불케 하는 과정을 거쳐 성사됐다. 키신저가 1971년 7월 9일 베이징에 도착하면서 기나긴 준비과정을 시작했다. 저우언라이는 키신저의 방문 두 달 전인 1971년 5월 중국인민해방군 지도자들에게 그의 방문을 알렸다. 그리고 북한을 방문해 키신저의 방중을 설명했다.

저우언라이는 김일성에게 “서로 다른 사회체제를 가진 국가 간의 평화공존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이는 저우언라이가 1년 전인 1970년 8월 루산에서 열린 제9기 2중 전회에서 격렬한 논쟁 끝에 입안한 외교정책이다. 린뱌오와 그의 지지자들이 격렬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핑퐁 외교’의 시대는 이미 개막되고 있었다.

계속해서 저우언라이는 김일성에게 “중국의 원칙이 바뀐 것은 없다. 중국은 미국 인민들에게 희망을 걸고 있다”고 강조했다. 김일성은 일단 중국의 입장을 지지한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닉슨 방중은 북한 주민들에게 새로운 문제이므로 조선노동당이 주민교육을 진행해야겠다”며 당혹스러워했다.

그러면서 그는 “지난날 조선 전쟁(6·25전쟁)에서 패배한 미제 침략자들이 판문점에 백기를 들고나오듯이 닉슨도 베이징에 백기를 들고 찾아오게 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미국은 국내적으로 베트남 반전운동과 경제 침체로 서산일락의 운명에 빠졌다고 깎아내렸다. 미국을 ‘철천지원수’로 부각해 체제의 정당성을 찾아온 북한으로서는 혈맹인 중국의 선택에 난처할 수밖에 없었다.

김일성은 키신저의 방문 이후 1971년 7월 30일 그의 ‘오른팔’로 불리던 김일 제1 부수상을 베이징으로 보냈다, 그의 손에는 미‧중 정상회담에서 논의했으면 하는 북한의 제안 8가지가 있었다. 김일은 그것을 저우언라이에게 전달했다.

북한의 제안 8가지

①남한에서 미군 완전 철수
②미국의 남한에 대한 핵무기‧미사일‧각종 무기제공 즉시 중단
③북한에 대한 미국의 침범 및 각종 정탐‧정찰행위 중지
④한‧미 연합군 해산
⑤남한에서 미군 대신에 일본군 대체 금지
⑥유엔 한국통일부흥위원단 해체
⑦미국은 남북한의 직접 협상 방해 금지
⑧유엔에서 한국 문제 토의 때 북한 대표 참가

8가지는 키신저가 2차 방문이 이루어진 1971년 10월에 미국 측에 전달했다. 하지만 키신저의 반응은 싸늘했다. 1972년 2월 미‧중 정상회담에서는 8가지 가운데 ⑤번만 다뤄지고 나머지는 논의되지 않았다. 이유가 있었다. 상하이 공동성명에서 ‘양국이 제3국을 위해서 협상하지 않는다’고 합의했기 때문이다. 결국 김일성은 중국이 가는 길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닉슨 방중 이후 미‧중은 당장에라도 수교를 맺는 듯했다. 하지만 미국은 워터게이트 사건, 중국은 문화대혁명 4인방 반대와 저우언라이‧마오쩌둥 사망 등으로 양국이 교착상태에 빠졌다.

그 바통을 카터 대통령과 덩샤오핑이 이어받았다. 이들은 1978년 전후로 새로운 지도부로 등장하면서 1979년 1월 국교 정상화를 체결했다. 국교 정상화 과정에서 상하이 공동성명과 마찬가지로 대만 문제가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상하이 공동성명(1972년 2월 27일)에서 미국은 대만이 중국의 일부라는 원칙을 수용하면서 대만 문제를 반드시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을 달았다. 하지만 중국이 요구한 대만에서의 군대 철수는 유보했다. 지역적 긴장 상태가 완화되는 정도에 따라 점진적으로 축소한다고 한 것이다. 결국 중국은 미국으로부터 ‘원칙적 동의’만 얻었다.

미‧중 수교 때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은 미국으로부터 ①대만과의 외교관계 단절 ②대만과의 상호방위조약 폐기 ③대만에서 미군 철수 등을 얻었다. 하지만 미국에 ①대만 문제의 평화적 해결 ②대만에 무기 수출 묵인 등을 양보했다. 특히 미국의 대만 무기 수출은 마지막까지 진통을 겪었다. 양국이 협의하는 과정에서 소통에 문제가 있었다. 중국은 미국이 대만 무기 수출 금지에 동의했다고 믿고 있었고, 미국은 무슨 소리냐는 것이다. 그것도 미‧중 수교를 며칠 앞두고 말이다.

덩샤오핑은 격노했다. 덩샤오핑은 레너드 우드콕 주중 미국 연락 사무소장에게 “이는 중국이 대만과의 대화를 통해 국가 통일 문제를 해결하려는 합리적인 방식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또한 그는 “대만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없으며 최종적으로 무력을 사용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우드콕은 분이 풀리지 않는 덩샤오핑을 조곤조곤 설득했다. 그는 “지금 가장 중요한 첫 번째 과제는 관계 정상화를 완수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어 그는 “관계 정상화 이후 시간이 흐르면 대다수 미국 관리들도 중국의 통일이 몇 년 내에 이뤄질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설득했다.

덩샤오핑은 싫지만 이를 받아들였다. 덩샤오핑 자신의 일생일대 가장 중요한 결정이었다. 그는 미국과 관계 정상화를 실현하면 4개 현대화 건설에 필요한 지식과 자본, 기술을 더 쉽게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념보다 실리를 선택한 것이다.

김일성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를 지켜보면서 “중국 혁명의 승리는 의외로 소련의 위대한 10월 혁명의 다음 가는 큰 국제적 사변이었다”고 평가절하했다. 우회적으로 불만을 토로한 것이다. 이에 김정일은 더 공격적으로 새로운 구호를 내세웠다. “우리식대로 살아나가자.” 북한이 지금도 자주 사용하는 구호인데 이때 처음 등장했다. 김정일은 “오늘 조성된 정세는 우리에게 자력갱생의 혁명 정신을 높이 발휘할 것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금 어느 나라도 남을 도와주려고 하지 않으며 도와주려고 해도 도와줄 형편이 못 된다”고 민감하게 반응했다.

결국 중국은 덩샤오핑이 말한 대로 “모든 국가의 당은 모두 각기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근거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며 ‘중국의 길’을 걸어갔다. 북한은 ‘중국의 길=개혁‧개방’에 동참하지 않고 ‘북한의 길=자력갱생’을 선택했다. 그런데 아이러니는 그 출발이 북∙중이 함께 싸웠던 미국이었다는 점이다.

고수석 국민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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