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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한국 기업 이사회는 자문기구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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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우진 서울대 경영대 교수

김우진 서울대 경영대 교수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상장기업들은 큰 변화를 겪어 왔다. 무엇보다 사외이사 제도가 도입되면서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던 이사회가 실제 회의를 하는 관행이 어느 정도 정착됐다. 25년가량 지난 지금에도 이사회에 대해 종종 ‘거수기’라는  비판이 제기되는데, 이는 타당하지 않다. 쟁점이 있는 안건은 사전에 담당 실무자들이 이사들에게 충분히 설명하는 절차를 거치고, 그래도 설득되지 않으면 안건은 상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외이사가 거수기라는 논리를 따르자면 국무위원들도 거수기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가능할 수 있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이사회에 상정되는 안건 자체가 경영진에 대한 견제와 감시라는 이사회 본연의 기능과 별 상관이 없다는 점이다.

미국의 상장기업은 창업한 뒤 1세대만 지나면 대부분 소유가 분산된 전문경영인 체제로 전환되고, 이사회가 중요한 기능을 담당한다. 한국에서는 이사회의 주요 기능을 ‘경영 자문’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데, 원칙적으로 자문은 이사회의 부차적 기능이다.

미국 기업은 이사회가 중요 역할
한국은 경영진 감시·견제 미미해
지배주주 결단과 인식 변화 필요

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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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이사회의 주요 기능은 최고경영진 선임 및 해임, 최고경영진 보수 결정, 인수합병·투자·자산매각 등 전략적 의사 결정, 위험 관리 및 회계 감독 등이다. 그런데 한국의 이사회는 대부분 이런 핵심적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다. 특히 지배주주가 있는 기업에서는 최고경영진에 대한 선임과 해임은 물론 보수 결정도 이사회에서 다뤄지지 않는다.

이사회의 내부 위원회 중 하나로 보수위원회가 정착된 미국과 달리 한국의 경우 금융회사에만 의무화돼 있다. 대부분의 일반 상장회사에는 보수위원회가 없다. 이사들이 경영진 보수 결정은커녕 보수 수준도 모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이론상으로 ‘국회’에 가까워야 할 이사회가 한국에서는 ‘회장님’에 대한 자문기구 또는 구한말 중추원(中樞院)처럼 운영되는 현실이 안타깝다. 이런 상황에서 지배주주의 개인회사로 일감 몰아주기와 횡령·배임을 통한 비자금 조성 등 일탈 행위를 이사회나 감사위원회가 사전에 방지하거나 사후에 적발하길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사실 이사회의 역할은 개인 지배주주가 있는 기업보다 금융지주 등 소유가 분산된 기업에서 훨씬 더 중요하다. 소유 분산 기업의 전문경영인은 지분이 없고, 배당 등 경영 성과에 따른 과실을 직접 받지 않기 때문에 이른바 ‘셀프 연임’ 등 대리인 문제가 심각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한국에서 소유 분산 기업의 이사회도 경영진 선임과 해임, 보수 결정이라는 경영진에 대한 핵심 견제 권한을 적절히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얼마 전 모 금융지주의 사외이사가 회장 연임 여부에 관해 설명조차 듣지 못했다며 사퇴한 일이 있었다.

한국의 현행 사외이사 시스템으로는 경영진 감시와 견제에 한계가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 사례로 거론된다. 그나마 이사회의 역할이 기대되는 소유 분산 기업에서조차 사외이사들이 겉도는 것은 아무래도 이들 기업에 대한 정부의 직간접 영향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 기업 GE의 최고경영자(CEO)는 이사회에서 선임한다. 성과가 좋지 않으면 이사회가 해임한다. 한국처럼 지배주주 일가 또는 감독 당국에 의해 내정되거나 일신상의 이유로 중도에 갑자기 사퇴하지 않는다. 미국식 이사회 중심 경영은 전문경영인 체제와 일종의 패키지다. 하지만 한국 기업들은 아직 대부분 지배주주가 CEO, 이사회 의장, 최대주주라는 서로 다른 지위를 겸하고 있다. 이 때문에 실질적인 이사회 중심 경영 체제를 갖추는 것은 말처럼 용이하지 않다. 이런 현실에서 이사회가 중추원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배주주의 결단과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 아울러 이사회에 의한 경영진 선임과 해임이 어렵다면, 최소한 보수에 대한 이사회의 통제부터 시작해야 한다.

미국 이사회의 3대 위원회로는 보상위원회, (이사 후보) 추천위원회, 감사위원회가 있다. 지금 한국은 보상위원회를 제외한 2개만 운영한다. 차제에 일정 규모 이상의 상장기업에 대해 보상위원회를 의무화하는 방안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지배주주가 이사회를 자문기구 정도로 인식한다면 이사회 중심의 경영은 요원하다. 이사회의 중요성을 말로만 강조할 때는 이미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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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진 서울대 경영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