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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승욱 논설위원이 간다

"모든 책임 내가 진다"는 윤 대통령…'윤증의 탕평' 품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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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서승욱 기자 중앙일보 정치국제외교안보디렉터
      서승욱 논설위원

서승욱 논설위원

논산 명재고택에서 바라본 윤 대통령 리더십

 "바로 옆 노성향교엔 담장이 있는데 이 집엔 담장이 없지 않느냐.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분당된 뒤 집권당인 노론의 감시가 심했다. 명재 선생은 기왕에 감시하려면 아예 대놓고 보라고, 자유롭게 보라고 담장을 헐었다고 한다."

지난 1일 오전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의 명재고택. 조선의 유학자 명재(明齋) 윤증(1629~1714)의 생전인 1709년, 그의 제자와 아들·손자들이 파평 윤씨 집성촌인 이곳에 지은 집이다. 탁 트인 신작로 옆에 자리 잡은 이 고택에 담장이 없는 이유를 이재철 문화관광해설사는 관람객들에 이렇게 설명했다. 쌀쌀한 날씨의 평일이었지만 자신을 파평 윤씨로 소개한 여성을 비롯해 몇 명의 관람객이 고택을 찾았다.

윤증 고택에는 왜 담장이 없을까

윤증은 숙종 때 '회니시비(懷尼是非)'로 불리는 갈등을 계기로 과거 스승으로 모셨던 노론의 영수(領袖) 우암 송시열과 갈라섰다. 당시 주류 세력이던 서인의 분열, 분당이었다. 윤증이 이끄는 소론은 집권 노론과 비교할 때 개혁적 소장파 색채가 강했다. 윤증과 명재고택은 파평 윤씨 35대손인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에서 승리하면서 재조명을 받았다. 당대 최고의 거물 송시열에 맞섰던 윤증은 윤 대통령의 10대조 종조부(할아버지의 형제)다.

작가 천준은 윤 대통령 인물탐구서인 『별의 순간은 오는가』에서 "윤증은 싸워야 할 사람과는 확실하게 대립각을 세웠다. 가치관과 철학을 뒤흔드는 상대와는 과감하게 정면으로 치고받았다"며 "마찬가지로 윤석열도 국정원 여론조작 수사나 조국 수사 등을 통해 힘센 사람들과 불편한 관계에 놓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했다. 또 "윤증은 마당발이라는 표현이 부족할 만큼 다양한 유형의 친구들을 사귀었고, 당시엔 '유학 내 이단'이던 양명학을 공부하는 사람들과도 교류했다"며 "친구들을 두루 사귀기 좋아하는 윤석열의 성품에도 꽤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했다. 윤증이 "우리를 감시하려면 마음대로 하시라"며 담장을 부쉈다는 설명을 들으니 두 사람의 기질엔 뭔가 닮은 점이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국민의힘 대선 후보 시절인 2021년 12월 경북 안동시 도산서원을 찾은 윤석열 대통령이 퇴계 이황 선생의 위패를 모신 상덕사에서 절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민의힘 대선 후보 시절인 2021년 12월 경북 안동시 도산서원을 찾은 윤석열 대통령이 퇴계 이황 선생의 위패를 모신 상덕사에서 절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내년 총선까지 어떤 리더십 보일까

최근 윤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30% 중·후반대에서 오르내린다. 40%대로 화끈하게 치고 올라가진 못하지만, 이준석 사태와 각종 시행착오로 고전했던 어둠의 시기는 벗어났다는 평가가 여권에서 나온다. 정권의 중간평가가 될 총선의 성적표는 앞으로 14개월 동안 윤 대통령의 리더십을 국민이 어떻게 평가하느냐에도 달려있다.

여권 내부엔 "학습능력이 뛰어난 만큼 초반의 시행착오를 극복하며 완만하지만 꾸준한 상승 곡선을 그릴 것"(대통령실 핵심 관계자)이란 기대감이 있다. 초반 실수를 딛고 정치 적응기를 거치며 리더십이 제 궤도를 찾아가고 있다는 주장이다. "책을 보다 궁금한 부분이 있으면 관련된 책을 다 찾아서 보는 거예요. 그러니 어떻게 진도가 나갈 수가 있겠어요? 그건 고시공부가 아니라 학문 연구를 하는 거죠." 서울 법대 동기가 전한 윤 대통령의 고시생 시절 공부법이다. (김연우  『구수한 윤석열』 중에서)

10대조 종조부인 윤증의 경우 평생 관직을 맡은 적이 없다. 85세로 별세할 때까지 우의정을 포함해 10번 넘게 수많은 관직에 제수됐지만, 한 번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반면 윤 대통령은 관직으로 가는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9번을 도전했다. 그의 서울 법대 동기는 윤 대통령이 고시에 번번이 떨어진 이유를 사법시험 준비 와중에도 많은 책을 읽고 토론을 즐겼던 '신림동 신선'의 공부법과 기질에서 찾았다.

화물연대 파업, 달라진 대응

속도는 늦을지 몰라도 확실하게 배워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빌드 업' 방식의 심화학습법이 대통령으로서의 국정 운영에 긍정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고 여권에선 주장한다. 이런 '두 번 실수는 없다'는 사례로 윤 대통령 주변에선 화물연대 파업과 폭우 대응을 꼽는다.

화물연대 파업은 윤석열 정부에서 두 번 있었다. 지난해 6월 첫 파업 땐 정부가 화물연대에 끌려다니는 듯한 모습이었다. "안전운임 지속 추진과 품목 확대 적극 논의" 등의 어정쩡한 합의에 당내에서도 "너무 쉽게 타협한 듯해 실망했다"(이언주 전 의원)는 반응이 나왔다. 하지만 11월 말~12월 초 파업 때는 달랐다. 업무복귀 명령 발동으로 "불법과는 절대 타협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했고, 화물연대는 결국 빈손으로 백기 투항을 했다.

수해 때도 비슷했다. 지난해 8월 강남 폭우 때는 사저에 머물면서 '폰트롤 타워' 논란까지 일었다. 하지만 9월 초 태풍 힌남노 때는 참모들과 용산 대통령실에 24시간 철야 대기하며 상황을 진두지휘했다.

충남 논산시 노성면에 위치한 명재고택. 소론의 영수였던 윤증 선생의 집이다. 서승욱 논설위원

충남 논산시 노성면에 위치한 명재고택. 소론의 영수였던 윤증 선생의 집이다. 서승욱 논설위원

노동·교육·연금개혁 의지 강해

윤 대통령의 용산 집무실 책상 위엔 지난해 5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선물한 명패가 놓여 있다. 'The BUCK STOPS here!(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란 영어 문구가 새겨진 나무 명패다. 해리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재임 1945~1953)이 집무실 책상 위에 항상 올려뒀다는 명패를 본떠 만들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나무 명패를 볼 때마다 대통령직에 대한 소명과 책임감을 가다듬는다고 참모들에게 윤 대통령이 자주 이야기한다"고 했다.

노동·교육·연금 개혁 등 3대 개혁에 대해 "인기가 없어도 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고, 갑론을박 가운데 한·미·일 결속 강화를 밀어붙이는 등 논란이 큰 이슈라도 자기 책임 하에 결정하고 책임도 자신이 지겠다는 생각이라고 참모들은 설명한다. 이동관 대외협력특별보좌관은 "명재 윤증은 '국가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오로지 국가 지도자가 어떤 마음을 다짐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며 "사사로움과 작은 이해를 돌아보지 않고 대의명분을 중시한 윤증 선생의 철학이 DNA에 각인돼있다는 느낌"이라고 했다.

반면 야당의 평가는 박하다. “왕조시대도 아닌데 대통령이 만기친람하고 있다. 여당은 용산 눈치만 보며 국회는 매번 재가를 받듯 만들고 있다"(박홍근 원내대표)라고 비판한다. 본인이 강하게 칼자루를 쥐고 일사불란함을 강조하는 듯한 리더십의 부작용에 대한 언급이다.

야당과 비판 세력이 대통령의 리더십을 공격하는 또 다른 포인트는 검찰 출신을 과도하게 등용한다는 인사 편중과 탕평의 부재, 또 국민 통합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 아니냐는 점이다.  통합과 탕평으로의 반전이 없는 한 윤 대통령 리더십이 높은 평가를 받기는 어렵다는 게 야당의 시각이다.

윤증 “반대편 인재도 등용해야”

그런데 윤증의 정치적 주장 중 노론과 가장 대조적이었던 특징이 바로 탕평과 화해, 인재의 고른 등용이었다. 그는 당시 서인과 대립했던 남인과의 원한 관계 해소, 반대 당 사람의 등용을 주장하며 남인에 대한 강경한 처벌을 주장했던 노론과 대립했다. 붕당 정치가 극에 달하고 집권 세력이 뒤집히는 정변(환국)이 잦았던 시기였지만 그는 남인과의 공생, 유능한 인재의 고른 등용을 강조했다. 『명재 윤증의 학문연원과 가학』(충남대 유학연구소 편)에 수록된 이애희의 논문 '윤증의 유학과 우계 성혼'은 "임금이 현자를 알아보고, 세상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끔 하는 일은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란 윤증의 생각을 전했다.

대선 후보 시절 윤 대통령을 만난 안동 유림들은 "사색당파 시절 특히 영남 남인에 대한 탄압이 있었을 때 명재 선생이 이를 저지해 몇몇 선비의 문중이 살아남았다"고 설명했다. 윤 대통령도 당선인 시절 첫 지방 행보로 안동을 찾아 탕평과 통합, 협치를 다짐했다.

작은 이해관계보다 대의명분과 소명을 앞에 둔다는 대통령의 리더십은 윤증의 '탕평과 협치'정신을 품고 진화할 수 있을까. 윤 대통령과 가까운 참모는 "단순히 어느 지역 사람 몇 사람을 등용하는 기계적 차원의 균형, 탕평, 협치가 아니라 더 큰 차원의 통 큰 탕평, 통 큰 통합의 모습을 윤 대통령이 보여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