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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변양균남기고 싶은 이야기

靑수석-예산실장도 모르고 싸웠다…'YS 금융실명제' 연막작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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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주정완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변양균 남기고 싶은 이야기] 진영을 넘어 미래를 그리다 〈18〉 예산 보고로 위장한 실명제 발표

변양균 전 기획예산처 장관

변양균 전 기획예산처 장관

민주화 이후 대통령에겐 공통된 고민이 있다. 국회의 협조를 얻지 못하면 아무리 대통령이라도 정책을 제대로 집행할 수 없다는 점이다. 노무현 대통령도 정부가 하려는 일이 생각만큼 빨리 진행되지 않는다고 불만을 나타낸 적이 있다. 당시 청와대 정책실장이던 나는 과거 10년간 정부가 입법을 추진한 2500여 건을 조사해 봤다. 정부가 정책을 결정한 시점부터 실제 집행까지는 평균 35개월이 걸렸다.

그런데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는 대통령이 법률과 같은 효력의 명령을 내릴 수 있다. 헌법 76조에 규정한 대통령 긴급명령권이다. 1987년 헌법 개정 이후 딱 한 번 사례가 있었다. 93년 8월 김영삼 대통령이 전격 단행한 금융실명제다. 청와대 경제수석도 모를 정도로 철통 보안 속에 이뤄졌다. 보안 유지를 위해 연막작전도 펼쳤다. 나는 그 연막작전에 두 차례 동원되는 해프닝을 겪었다.

경제수석도 따돌린 실명제 작업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깜짝 발표
YS “안기부, 청와대도 도청하나”
정보·국방예산도 면밀 검토 지시

새벽에 경제수석과 전화로 언쟁

1993년 8월 12일 김영삼 대통령이 금융실명제 시행 긴급명령을 발동하는 특별담화문을 읽고 있다. 앞 줄 왼쪽에서 셋째가 이경식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중앙포토]

1993년 8월 12일 김영삼 대통령이 금융실명제 시행 긴급명령을 발동하는 특별담화문을 읽고 있다. 앞 줄 왼쪽에서 셋째가 이경식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중앙포토]

내가 경제기획원 예산총괄과장으로 있던 93년 8월 12일, 대통령 보고 일정이 잡혔다. 이경식 경제부총리 일정표에는 예산안 중간보고로 적혀 있었다. 그때는 해마다 8월 중순에 예산안 편성을 마무리하고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말이 중간보고지 사실상 완성본을 가져가는 절차였다. 여기서 대통령 지시 사항이 있으면 그 부분만 수정해 최종 보고를 했다.

하루 전 이석채 예산실장과 함께 박재윤 청와대 경제수석에게 사전 보고를 했다. 그 중엔 외부에 공개할 수 없는 민감한 자료가 있었다. 지역별 예산 배분 내역이었다. 그때만 해도 지역갈등이 지금보다 훨씬 심했다. 어느 지역에는 예산이 많이 가는데 어느 지역은 푸대접을 받는다는 말이 나오면 곤란했다.

서울대 경제학 교수 출신인 박 수석은 이런 자료를 처음 봤을 것이다. 이 실장과 박 수석 사이에 언쟁이 벌어졌다. “이런 걸 보고하면 대통령에게 부담을 주는 겁니다.”(박재윤) “예전에도 보고했던 겁니다. 대통령도 알고 계셔야 하는 내용입니다.”(이석채) “반드시 빼야 합니다. 이 자료를 넣으면 내일 예산 보고를 못 하게 하겠습니다.”(박재윤)

그날 저녁 이 실장은 나에게 지시했다. “보고서는 그대로 출력하게.” 그리고 퇴근해 버렸다. 나는 두 사람이 정면으로 부딪치면 무슨 사달이 생길까 걱정스러웠다. 밤늦게까지 고민하다 다음 날 오전 5시쯤 전화로 박 수석을 찾았다. 체육관에서 아침 운동을 하던 박 수석과 겨우 연결이 됐다. “그 자료는 보고서에 들어갑니다. 이미 제본까지 마쳤습니다.” 나는 최대한 양해를 구하려고 했다.

부처 과장이 청와대 수석에게, 그것도 새벽에 전화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박 수석은 고교(부산고) 선배였지만 아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아마 공무원 출신이면 엄청 화를 냈을 텐데 박 수석은 교수 출신이라 그런지 나를 설득하려고 했다. 서로 평행선만 달리다가 전화를 끊었다.

아침에 사무실에 출근했더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청와대에서 전갈이 왔다. “지금 부총리만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갔습니다. 예산실장하고 경제수석은 못 들어가고 밖에서 대기 중입니다.” 예산실 국장들이 모여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었다. 내가 새벽에 있던 일을 얘기하자 다들 깜짝 놀랐다. ‘설마 내가 사고를 친 건가.’ 나도 속으로 조마조마했다.

몇 시간 뒤 의문이 풀렸다. 그날 저녁 김 대통령은 특별담화문을 내고 금융실명제 긴급명령을 발표했다. 예산 보고로 위장한 연막작전이었다.

밥도 거르며 만든 보고서가 헛고생

나중에 알았지만 연막작전은 이날 한 번뿐이 아니었다. 같은 해 7월 말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예산안 작업이 막바지로 치달으며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던 때다. 부총리실에서 긴급 지시가 내려왔다. 다음 날 아침 대통령에게 예산 현안을 보고하는 일정이 잡혔으니 보고서를 정리해 늦어도 오후 9시까지 부총리 집으로 가져오라고 했다.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당시 대통령 보고 자료는 일주일씩 밤을 새워가며 만드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날 저녁도 걸러가며 오후 8시쯤 겨우 보고서를 완성했다. 지금은 없어진 서울 강남역 동아극장 뒤쪽 언덕에 이 부총리의 집이 있었다. 내비게이션은 당연히 없던 시절이다. 자동차를 몰고 좁은 골목길을 헤매다 보니 사이드미러가 깨지기도 했다.

간신히 시간 안에 부총리 집을 찾아 보고서를 전달했다. 내가 잠시 설명하려고 하자 이 부총리가 말렸다. “내가 보면 다 알 수 있네. 모르는 게 있으면 전화하겠네.” 다음날 평소보다 일찍 출근해 혹시 모를 전화를 기다렸다. 전화가 올 리가 없었다. 예산 보고는 위장막일 뿐이었고 실상은 이 부총리의 금융실명제 보고였다. 두 번 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다.

사실 금융실명제를 추진한 건 김 대통령이 처음이 아니었다. 경제기획원과 재무부에선 진작부터 금융실명제를 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인 1982년 7월에는 금융실명제 추진 방안을 공식 발표하기도 했다. 강경식 재무장관과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이 전 대통령 결재를 받아 금융실명제 도입에 나섰다. 하지만 기득권 세력의 벽에 부딪혀 실패했다. 우여곡절 끝에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기는 했지만 부칙으로 시행 시기를 무기한 연기하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노태우 대통령도 87년 대선에서 금융실명제 실시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이 김영삼·김종필 총재와 손잡은 3당 합당 이후 흐지부지됐다. (※당시 문희갑 청와대 경제수석은 “3당 합당 과정에서 금융실명제 시행은 유보한다는 비밀협상이 있었다”는 증언을 남겼다.)

김영삼 대통령이 긴급명령으로 금융실명제를 도입한 데는 그런 실패의 경험이 교훈이 됐을 것이다. 김 대통령은 헌법에 규정한 대통령 권한으로 일반적인 입법 절차를 대신했다. 이후 국회 본회의에서 찬성 268명, 반대 1명의 압도적 찬성으로 사후 승인을 받았다.

일부에선 금융실명제가 해외 선진국에는 없는 제도라고 주장한다. 실상을 잘 몰라서 하는 얘기다. 서구 선진국에선 금융실명제가 아니라도 다른 법으로 비정상 거래나 탈세를 엄격히 단속한다. 일본도 경제 관료들은 한국의 금융실명제를 부러워한다. 정경유착으로 특혜를 누리는 이들을 잡아내려면 금융실명제가 꼭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80~90년대 정보기관 도청 해프닝

이석채

이석채

금융실명제 위장 보고 해프닝이 끝난 뒤 진짜 예산 보고 일정을 잡았는데 이때도 해프닝이 있었다. 이석채 실장의 설명을 듣던 김 대통령이 물었다.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예산은 어떻게 되나.” 이 실장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대통령이 재촉하니 이 실장은 용기를 내서 말했다. “안기부에서 다 도청하고 있습니다. 제가 뭐라고 보고하는지 안기부가 다 파악하고 있습니다.”

김 대통령은 당장 안기부장을 전화로 연결하라고 했다. 그때 안기부장은 한국외대 정치외교학 교수 출신인 김덕씨였다. “당신네 안기부, 청와대도 도청하나.”(김영삼)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김덕) 이게 끝이 아니었다. 김 대통령은 “앞으로 안기부·국방부 예산도 경제기획원이 다 들여다보고 짜라”고 지시했다. 그 후 이 실장은 안기부를 찾아가 사과하기도 했다.

정보기관과 관련한 개인적 경험은 그 전에도 있었다. ‘서울의 봄’으로 불리던 80년 4월 무렵이다. 나는 경제기획원 사무관으로 김재익 경제기획국장 밑에서 일하고 있었다. 아직 전두환 신군부가 본격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기 전이었다. 어느 날 김 국장이 도시산업선교회의 인명진 목사를 만나보라고 제안했다. 김 국장은 “반정부 성향 단체도 최대한 체제 안에서 활동하게 해보자”고 취지를 설명했다.

나는 노동운동을 하는 친구를 통해 인 목사의 연락처를 받았다. 사무실 전화로 통화해 약속을 잡고 찾아갔다. “우리 사회보장 제도가 많이 부족한 건 사실입니다. 그래도 극빈층은 어떻게든 도와주지 않습니까.”(변양균) “그게 진정으로 가난한 사람을 위한 겁니까. 거리에 굶어 죽은 사람이 많이 보이면 폭동이 날까 봐 그러는 거 아닙니까.”(인명진) 나로선 전혀 대화가 통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사무실로 돌아왔더니 난리가 나 있었다. 국장 비서에게 물으니 김 국장과 이석채 과장이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에 불려갔다고 했다. 부총리와 차관도 각각 중앙정보부와 치안본부(현 경찰청)에 해명하러 갔다. 당시로선 경제기획원 사무관이 반정부 성향 단체와 접촉한 것 자체가 놀라운 사건이었다. 알고 보니 내가 도시산업선교회와 통화하는 걸 중앙정보부에서 다 엿듣고 있었다. 주요 반정부 성향 단체의 전화는 정보기관에서 도청하는 게 상식으로 통하던 오래전 얘기다.

정리·대담=주정완 논설위원, 이정재 전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