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독한 수출 한파가 반도체·중국을 넘어 다른 분야까지 집어삼킬 기세다. 중국 뒤에서 버텨주던 ‘2위 수출시장’ 아세안(ASEAN·동남아국가연합)마저 흔들리는 양상이 뚜렷해졌다. 대(對)아세안 수출이 4개월째 역성장을 이어가면서 올해 수출 전반에 경고등이 켜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핵심 성장엔진인 수출이 휘청거리면서 한국은 올해 경제성장률이 아시아 주요 12개국 중 꼴찌로 추락하는 비상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6일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9개 해외 주요 투자은행(IB)은 올해 한국의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평균 1.1%로 예상했다. 이들 IB는 아시아 국가 대부분의 성장률 예측치를 최근 한 달 새 상향 조정했다. 중국(4.8→5.2%), 베트남(6→6.1%), 필리핀(5.1→5.3%), 태국(3.7→3.8%) 등이다. 중국의 ‘위드 코로나’ 전환, 원자재 가격 안정, 통화긴축 완화 기대 등을 반영했다.
그런데 한국은 예외였다. 1%를 간신히 턱걸이하는 수준의 성장 전망이 유지됐다. 올해 경제성장률로 따지면 아시아 주요 12개국 가운데 최하위다. 선진 경제권으로 분류되는 홍콩(3%), 싱가포르(1.8%)는 물론 ‘저성장의 상징’ 일본(1.3%)에도 뒤지는 수치다.
내년 전망도 어둡다. 국제금융센터 집계 결과 9개 IB가 예상한 한국의 내년 성장률은 2%다. 12개 아시아국 중 일본(0.9%) 다음으로 낮다. 내년 성장률로 비교해 봐도 한때 한국과 함께 ‘아시아의 4마리 용’으로 불리던 홍콩(3.3%), 대만(2.6%), 싱가포르(2.3%)에 밀리는 형국이다. 신흥국 베트남(6.8%), 인도(5.8%), 필리핀(5.5%), 인도네시아(5%) 등에는 한참 못 미친다.
반전의 기회를 찾기 쉽지 않다는 게 문제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수출 부진, 에너지 수입으로 인한 적자 누적, 여전히 높은 물가와 금리, 부동산 경기 하강, 소비 부진까지 한국 경제를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이 한가득이다. 저출생 고령화와 맞물려 저성장이 깊게 뿌리내릴 위험도 커지고 있다.
무엇보다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면서 대체시장으로 꼽혔던 아세안에 대한 수출 감소는 돌발적 위기 상황이다.
“아세안은 한국의 마지막 수출 보루…정부, 공급망 환경 마련 적극 뛰어야”
동남아 10개국으로 구성된 아세안은 꾸준한 성장 속에 국내 수출·무역수지의 새로운 버팀목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지난해 대아세안 수출액은 1249억2000만 달러로 2021년 1088억3000만 달러를 넘어 최대 기록을 세웠다. 연간 무역흑자도 423억8000만 달러로 미국(280억4000만 달러) 등을 제치고 한국의 최대 흑자 시장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아세안도 지난 연말부터 이상 신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0월(-5.7%)부터 수출이 전년 동기 대비 감소세로 전환되더니, 올 1월 들어 -19.8%로 감소 폭이 커졌다. 4개월 연속 수출이 줄어든 건 코로나19 유행 초기인 2020년 3~8월 이후 2년여 만이다. 수출이 줄어드니 무역수지도 악화하고 있다. 지난해 7월까지 월 40억 달러대를 유지했던 대아세안 무역흑자는 지난해 12월 25억7000만 달러에 이어 지난달 11억3000만 달러로 떨어졌다. 베트남의 세계 수출이 지난해 9월 12.4%에서 12월 -16.1%로 급락하면서 한국 수출에 먹구름이 끼게 됐다.
중국 수출 감소에 이어 아세안 수출 감소까지 겹치면서 한국 수출 전체가 하향 곡선을 그리게 됐다. 한국의 수출은 지난해 10월 이후 넉 달째 ‘마이너스’를 찍고 있고, 지난달엔 최대 감소 폭(-16.6%)을 나타냈다. 무역수지는 11개월 연속 적자 행진 중이다. 1월 무역적자(126억9000만 달러)는 역대 월간 최대를 찍었다.
곽성일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경제안보전략실장은 “아세안은 한국에 남은 마지막 수출 보루와 같다. 아세안으로의 중간재 수출이 정체되고, 베트남 등에서 중국산 수입 비중이 늘어나는 게 가장 우려되는 지점”이라며 “정부는 아세안 전체를 묶는 공급망과 투자 환경 마련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