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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잡은 토종닭 ‘육회’로 즐긴다…땅끝마을의 닭 코스요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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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면

전남 해남군 해남읍 닭요리촌의 코스요리 상차림. 닭 가슴살 회부터 주물럭-구이-백숙-닭죽을 순서대로 내놓는다. 프리랜서 장정필

전남 해남군 해남읍 닭요리촌의 코스요리 상차림. 닭 가슴살 회부터 주물럭-구이-백숙-닭죽을 순서대로 내놓는다. 프리랜서 장정필

지난달 30일 오후 전남 해남군 ‘통닭거리’ 내 진솔통닭. 이명순(64·여) 사장이 닭 가슴살로 만든 육회를 접시에 담아냈다. 육회 옆에는 갓 썰어낸 닭 가슴살과 모래집 회가 담긴 접시를 놓았다. 가게 간판에 적힌 ‘통닭’ 문구와는 달리 튀김닭은 찾아볼 수 없었다. 주방 한쪽에 놓인 찜솥에서 백숙이 삶아지는 것도 여느 통닭집과는 다른 모습이다.

이 사장은 “4㎏짜리 토종닭 한 마리를 통째로 맛본다는 뜻에서 통닭”이라며 “시중에서 파는 치킨이나 어린 삼계로 만든 닭요리와는 영양가나 풍미가 다르다”고 했다.

땅끝마을로 알려진 해남에는 ‘통닭’ 가게들이 몰려있는 거리가 있다. 흔히들 통닭이라면 기름에 튀긴 닭을 떠올리지만 ‘양념치킨’ 같은 메뉴는 없다. 닭 한 마리를 통째로 모두 요리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닭 가슴살로 만든 회와 주물럭·구이·백숙·닭죽을 두루 내놓는 코스 요리다.

천년고찰인 대흥사 입구에 독특한 통닭집이 생긴 것은 1970년대 중반이다. 1995년 작고한 박상례 할머니가 아들과 함께 1975년 주막을 겸한 상점을 연 게 시초다. 배고픈 시절 주민들은 박 할머니 가게에서 닭이나 삶은 계란·두부를 안주 삼아 낱잔으로 파는 ‘잔(盞)술’을 마셨다.

간판도 없던 가게는, ‘아무개 잔술집’ 하면 읍내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주말이면 대흥사를 찾은 관광객들까지 닭백숙을 먹고 갔다. 덕분에 가게 뒷마당에 걸려있던 가마솥에서는 온종일 닭 삶는 냄새가 났다.

백숙맛이 알려지자 1986년 가게 옆에 새로 식당을 냈다. 닭고기를 먹고 오래 살라는 뜻에서 장수통닭이라는 간판도 달았다. 당시 4000원하던 촌닭을 사서 6000원에 팔다 보니 손해가 나기 일쑤였다. 적자가 많이 난 해에는 직접 농사지은 쌀이나 고추를 팔아 메꿀 정도였다. 그래도 박 할머니네는 닭발이나 닭 가슴살을 들녘에서 일하던 이웃들에게 건네며 정을 나눴다.

할머니의 손맛을 코스요리로 발전시킨 것은 장남 안재근(79)씨다. 개업 후 손님들이 가슴살을 많이 남기는 것을 보고 궁리 끝에 회(생고기)를 생각해냈다. 퍽퍽한 가슴살에 참기름과 깨로 양념해서 손님상에 내놓았다.

손님들이 남기던 가슴살 ‘회’로 변신

해남 닭요리촌의 닭 가슴살과 모래집 회. 쫄깃쫄깃한 식감이 특징이다. 프리랜서 장정필

해남 닭요리촌의 닭 가슴살과 모래집 회. 쫄깃쫄깃한 식감이 특징이다. 프리랜서 장정필

맛을 본 손님들은 닭 가슴살의 고소한 식감에 감탄했다. 야들야들한 닭살이 입에서 부드럽게 녹는 듯한 맛을 담은 신메뉴였다. 가슴살 회가 알려지면서 3㎏짜리 토종닭 한 마리를 요리해주던 식당에는 매일 손님들이 북적였다.

안씨는 1989년 닭 가슴살 회를 불고기처럼 요리해 먹는 주물럭을 상에 올렸다. 날것을 싫어하는 손님을 위해 불판에 익혀 먹도록 머리를 짜냈다. 안씨는 회와 주물럭의 명성이 알려질 때쯤 메뉴판에 ‘코스요리’를 추가했다.

닭 코스요리는 출시 직후부터 인기를 끌었다. 소문을 듣고 온 손님들은 너도나도 백숙보단 코스요리를 주문했다. 1990년대 말부터 ‘통닭’이라는 간판을 단 백숙집들이 주변에 속속 문을 연 배경이다. 현재 연동리 일대에는 11곳의 닭코스요리집이 영업을 하고 있다. 뒷산 지형이 노란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어서 조선시대 말까지 ‘황계동’(黃鷄洞)이라 불렸던 곳이다.

식당 대부분은 닭이 전문이지만 오리나 오골계로 만든 코스요리 집도 있다. 닭 육회를 과일양념으로 숙성시켜 내놓거나 토종닭을 묵은김치와 함께 요리한 삼계탕도 있다. 해남 특산품인 황칠나무와 더해진 황칠오리백숙을 전문으로 하는 집도 있다.

가게마다 특유의 비법은 있지만 통닭거리 업주들이 한목소리로 하는 말이 있다. “갓 잡은 토종닭에 최상의 식자재만을 써야 한다”는 말이다. 닭은 기름기가 많은 암탉보다 쫄깃한 맛을 내는 수탉만을 쓴다. 진솔통닭 명승호(67) 사장은 “잡은 닭을 냉장고에 넣었다 빼면 죽었다 깨나도 이 맛을 못 낸다”며 “여름엔 새벽 2시부터 닭을 잡는데 6~7개월 키운 수탉이 가장 부드럽고 단맛이 난다”고 했다.

모래집·닭날개 ‘회’ 애주가 안주로 인기

해남군도 통닭거리 이름을 ‘닭코스음식거리’로 정하고 지원에 나섰다. 지난해 2월에는 11억 원을 들여 닭요리 전문점 11곳의 간판과 주차장 등을 정비했다. 인근 대흥사, 고산 윤선도 유적지 등과 연계한 관광사업도 추진 중이다. 명현관 해남군수는 “닭코스음식거리를 지역 축제와의 연계 등을 통해 남도의 관광 브랜드로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해남식 통닭은 부위별로 조리한 음식을 차례로 제공하는 게 특징이다. 닭 가슴살 회부터 모래집-주물럭-구이-백숙-닭죽을 순서대로 내놓는다.

모래집과 닭 날개로 만든 회는 애주가들에게 특히 인기다. 닭 날개는 생것을 뼈를 발라낸 다음 마늘과 참기름에 버무려 내놓는다. 여느 닭발 안주처럼 익히지 않았는데도 잡내가 없고 고소한 맛이 난다.

백숙을 소금이 아닌 초간장에 찍어 먹도록 한 것도 비법이다. 간장에 식초와 대파를 썰어 넣어 시큼하면서도 담백한 맛이 난다. 요리의 대미(大尾)인 닭죽은 녹두와 쌀을 넣어 끓이는데 손님이 원할 때까지 리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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