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소년중앙] 판타지 속 판타지를 찾아서 61화. 은혜 갚은 까치

중앙일보

입력

과거 보러 한양 가는 선비가 활을 챙긴 까닭

조선시대 한 선비가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길이 발달하지 않았던 만큼 여정은 험난하기 이를 데 없었고, 산 넘고 강을 건너 한참을 나아가야 했죠. 산속을 걷던 선비는 어딘가에서 까치가 시끄럽게 우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선비가 그쪽으로 가자, 웬 커다란 구렁이가 나무를 감고 올라가 까치둥지를 노리고 있었죠. 부모 까치는 어쩔 수 없이 주변을 날며 울부짖을 뿐이었습니다. 선비는 마침 갖고 있던 활을 들어 단방에 구렁이를 맞혀 까치 가족을 구했죠.

어느새 날이 저물었지만, 산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길을 헤매던 선비는 멀리 불빛을 보고 찾아갑니다. 도착한 곳은 작은 오두막. 산속에 이런 집이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선비는 문을 두드렸죠. 그러자 안에서 젊은 아가씨가 나와서 선비를 맞이했어요. 다행히 그곳에 머무를 수 있게 된 선비는 아가씨가 차려준 밥을 먹고 잠이 들었죠. 잘 자던 선비는 몸이 답답한 것을 느끼고 깨어났습니다. 이게 웬일인가요. 커다란 구렁이가 선비의 몸을 칭칭 감고 노리고 있었어요.

조선의 선비는 학문뿐만 아니라 활 솜씨도 뛰어난 이들이었다. 영화 ‘최종병기 활’에서도 몰락한 선비의 후예가 신궁 같은 활 솜씨를 펼쳐낸다.

조선의 선비는 학문뿐만 아니라 활 솜씨도 뛰어난 이들이었다. 영화 ‘최종병기 활’에서도 몰락한 선비의 후예가 신궁 같은 활 솜씨를 펼쳐낸다.

놀란 선비에게 구렁이는 사람의 말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낮에 네가 쏘아 죽인 구렁이의 아내다. 네가 내 남편을 죽인 게 억울하고 분통하여 너를 살려 보내지 않을 것이다.” 선비는 미안하다며 하소연했지만, 구렁이는 말을 듣지 않았죠. 자신은 불쌍한 까치들을 구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항변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대신 구렁이는 비웃듯이 말했죠. “좋다. 저 언덕 위에 있는 절에 종이 세 번 울리면 너를 살려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 위기에 빠진 선비는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아마 많은 소중 독자 여러분이 결말을 알고 있을 겁니다. 낮에 구해 준 까치가 머리로 종을 들이받아 선비를 구해주지요. 비록 말 못하는 짐승일지라도 자신의 은혜는 반드시 갚는다는 교훈을 담은 민담 ‘은혜 갚은 까치’의 대목입니다. 왜 구렁이가 종이 울리면 살려준다고 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비슷한 내용으로 강원도 치악산(雉岳山‧꿩이 있는 산)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는 전설 ‘은혜 갚은 꿩’에 따르면, 뱀이 쇳소리를 싫어해서 그랬다고 해요. 또 구렁이가 사실 용이 되고자 수행하던 이무기였는데, 종소리가 울리면 용이 될 수 있다고 해서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었기에 살려주었다고도 하죠. 어느 쪽이건, 사람의 말을 할 수 있고 사람으로 변할 수도 있는 구렁이는 보통 구렁이가 아니라 대단한 영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단순한 구렁이가 아니라 용이 되기 직전의 이무기였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죠.

흥미로운 점은 또 하나 있습니다. 도대체 왜 선비는 활을 갖고 있었을까요. 그리고 어떻게 구렁이 머리처럼 작은 표적을 단번에 맞혀 떨어뜨릴 수 있었을까요. 그가 보려던 시험이 무예를 겨루는 무과였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한편으로 조선의 선비들이 사실 활을 매우 좋아하고 활 솜씨를 자랑하는 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선비란 ‘학식과 인품을 갖춘 사람’을 부르는 말이죠. 특히 유교에서 선비는 유교 사상을 받아들여 좋은 사회를 이끌어나가고자 노력하며 선행을 하는 이들을 말했습니다. 선비라고 하면 밖에도 나가지 않고 방에만 틀어박혀 있는 책벌레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공부만이 아니라 이를 실천하고 노력하는 자세를 지닌 이들을 선비라고 했죠.

조선의 선비는 무엇보다도 유교 정신을 따라 노력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중국의 공자가 창시한 유교, 또는 유학은 춘추전국시대 혼란한 세상을 어떻게 안정시킬까 노력하는 과정에서 나온 여러 학문 중 하나였죠. 당연히 실천을 중시하고 계속 수행하게 한 것이 중요해요. 유교에서는 책을 보고 글을 짓고 토론하는 것뿐 아니라, 음악이나 예법, 산술 같은 여러 교양을 쌓도록 했는데 그중 활쏘기와 말타기도 있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처럼 군인으로 활동한 분들 역시 당연히 선비였죠.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한 분들이 대부분 선비였던 것도, 가상의 조선을 무대로 좀비와 싸우는 드라마 ‘킹덤’에서 갓을 쓴 선비들이 무쌍을 펼치는 것도 그럴듯합니다. 사회 지배층이다 보니 아무래도 잘 먹을 수 있었고, 말타기를 즐겼으니 체격이 크고 튼튼하며 어깨도 떡 벌어지고 당당한 모습의 장정들. 활 쏘기를 교양으로 즐겨 200보 밖(145m 정도)에서 붉은 과녁을 맞히지 못하면 부끄러워했던, 조선의 선비는 사실 그런 이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선비를 노린 구렁이는 확실히 보통 구렁이가 아니었던 거죠.

그럼 까치가 구해준 선비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여기에도 여러 이야기가 있습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먼저 몸과 마음을 수양하고 집안을 안정시키며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논한다)를 추구하던 선비답게 과거에 합격했다고도 하고, 까치의 넋을 기리기 위해 스님이 되었다고도 하죠. 어느 쪽이건, 선비라는 존재의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결말이 아닐까 합니다. 최근 한국을 무대로 한 판타지 이야기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글만이 아니라 음악 같은 교양에 뛰어나고 무술, 특히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는 선비를 주역으로 해보면 어떨까요.

전홍식 SF&판타지도서관장

전홍식 SF&판타지도서관장

※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