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가전·IT(정보기술) 박람회 'CES 2023'에서 K-스타트업 행사가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302/06/94ff0259-e56a-487b-8a94-6feaf7783536.jpg)
세계 최대 가전·IT(정보기술) 박람회 'CES 2023'에서 K-스타트업 행사가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클 때는 ‘글로벌 스탠다드’, 불경기엔 ‘한국 기업’. 국내 스타트업 창업자들이 처한 딜레마다. 글로벌 큰손의 투자를 받고 ‘실리콘밸리처럼’을 꿈꾸며 성장해온 스타트업계. 혹한기를 맞아 노동 유연성이 떨어지는 한국에서 조직·사업 재정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무슨 일이야
고금리·고물가·엔데믹 폭격에 정보기술(IT)·게임 업계에도 구조조정 칼바람이 분다. 지난해 12월 국내 최대 유튜버 소속사(MCN) 샌드박스네트워크는 일부 직원 권고사직을 통보했고, 패스트파이브·뤼이드·정육각 등 누적 1000억원 이상 투자받은 업체들마저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구글·아마존·메타 같은 미국 빅테크들도 전체 직원의 6~13%가량을 해고하는 대대적 감원 절차에 돌입했다. 그러나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최근 해고된 미국 테크 근로자의 79%는 해고 3개월 내에, 37%는 한 달도 못 돼 재취업에 성공했다. 실리콘밸리 기업들의 ‘쉬운 해고’가 사회적 갈등으로 번지지 않는 배경이다.
고용 시장이 얼어붙은 한국 상황은 다르다. 기업 생존을 위해선 사업 축소나 방향 전환(pivoting·피보팅)이 필요하지만 고정된 인력을 재배치하는 것도 쉽지 않다. 스타트업 창업자들은 “내보낼 직원을 일대일로 만나서 다 설득하느라 회사의 모든 자원과 정신적 비용까지 동원되는 상황”, “당장 일감이 없어 유튜브를 보는 직원에게 ‘제발 나가달라’고 사정해도 ‘이직할 곳이 확정되면 나가겠다’는 답이 돌아온다”고 호소한다. 최근 조직 규모를 절반으로 줄인 한 스타트업 대표는 “이 과정에서 남은 자금과 에너지를 다 소진하고 결국 폐업하는 스타트업들도 적지 않다”라고 말했다.
왜 그렇게 됐지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국내 IT 스타트업은 전 세계 유동성이 넘치던 지난 5년간 국내외 벤처캐피탈(VC)의 투자를 받으며 성장했다. 독일 딜리버리히어로(DH)에 매각된 우아한형제들(배달의민족 운영사, 2019년), 쿠팡의 뉴욕증시 상장(2020년) 같은 대형 엑시트(exit·투자금 회수) 사례가 이어지자 글로벌 투자자들도 한국 기업에 관심을 보인 것.
이들 스타트업은 ‘잘 될 때 공격적으로 투자해 압도적 1위에 오른다’는 유니콘 기업의 성공 방정식을 따라 성장했다. 하지만 ‘안 되면 빠르게 전환’이라는 후퇴 공식이 국내에선 적용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① 글로벌과 한국식의 ‘미스매치’: 창업 10년 차인 한 글로벌 스타트업 대표는 “불경기 때 해고가 안 된다는 점을 외국 투자자들이 이해하지 못해서 설득하는 데 애로 사항이 있었다”고 말했다. 익명을 원한 또 다른 스타트업 창업자는 “미국 사업부 철수 당시 하루 만에 인력이 정리됐다”며 “현지 담당자에게 ‘문제가 되진 않겠냐’고 물었더니 ‘계약 조건을 불이행한 것도 아닌데 왜 문제가 되냐’면서 나를 외계인 취급하더라”고 말했다.
② ‘고속 성장’ 대신 ‘얼마나 버티나’: 불경기 투자의 기준은 ‘런웨이(runway·법인통장 잔고가 0원이 될 때까지 생존할 수 있는 기간)’로 바뀌었다. 헬스케어 분야의 6년 차 창업자는 “과거엔 받은 투자금을 1~2년 내 소진해서 사업을 키워야 정상이라는 분위기가 만연했다”며 “투자자들의 조언대로 조직을 키웠다가 현재 자금난으로 고민하는 대표들이 많다”고 토로했다. 달라진 분위기에 구조조정을 고민하는 스타트업이 늘자 근로자의 불만도 커지고 있다. “경영 방식이 실패한 건데 왜 직원들이 책임을 져야 하냐”는 것.
③ 변화는 빠른데 인력은 없고: IT·게임업계는 현업에서 필요로 하는 기술이나 시장의 유행이 빠르게 변한다. 만약 모바일·캐주얼 게임이 유행하다가 콘솔·고사양 게임으로 인기가 옮겨가면 인력 구조도 이에 따라 바뀌어야 하는 것. 게임 업계에서 프로젝트성으로 팀을 모았다 해체하는 특성이 두드러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게임업계 관계자는 “사람은 많은데 정작 사업에 필요한 인력은 없는 경우가 빈번하다”고 하소연한다.
제도 있지만 실효성은 ‘글쎄’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국내 기업은 경영난에도 작업방식 합리화나 일시휴직·희망퇴직·전근 등 직원의 해고를 회피할 수 있는 노력을 먼저 기울여야 한다. 기존 직원의 직무 재교육, 부서 재배치를 통한 인력 재편도 이에 해당한다. 이를 지원하는 제도도 있다. ‘사업주에 대한 직업능력개발 훈련의 지원’을 명시한 고용보험법에 따르면 사업자가 재직자를 재훈련할 경우 그 비용을 고용보험 기납부액의 100~240% 한도에서 보조해준다. 이를 위해 지난해 2744억원의 예산도 배정됐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 부담되는 행정 비용: 창업자들은 “시간·돈·사람 없는 스타트업으로선 불가능한 얘기”라고 말한다. 재직자 훈련비를 지원받으려면 기업이 자체 교육과정을 짜서 한국산업인력공단의 인증을 받고, 정부 보조금을 수령할 시스템·담당자를 갖추는 등 행정 절차가 필요한데 여기에 적지 않은 자원이 소모되기 때문. 학원 등 전문 위탁업체에 직원 교육을 맡긴 뒤 비용을 보조받는 방식도 있지만, 이 경우 실제 현장에서 필요한 기술을 맞춤으로 배우기 어렵다.
◦ 업무 재배치 갈등도: 현재 게임업계에선 개발자가 알아서 새 기술을 배우는 분위기다. 국내 대형 게임사 관계자는 “개발자의 사고력이나 코딩 능력과는 별개로, 게임엔진 등 새로운 개발환경을 체득하는 시간이 걸린다”라고 말했다. 문제는 회사가 이를 기다려 줄 여력이 되느냐는 것. 한 중견게임사 관계자는 “큰 게임사는 장르·기술이 다양한 다수 게임을 동시에 개발하기에 업무 재배치가 가능하겠지만, 한두 개 게임의 성공을 바라며 달려온 소형 게임사들은 여의치 않다”라고 말했다. 최근 게임사 데브시스터즈를 둘러싼 갈등도 이 같은 배경에서 비롯됐다. 이 회사는 부서 재배치 과정에서 직원의 업무 계정을 하루아침에 정지해 ‘당일 해고’ 논란을 빚었다.
진짜 대책은 있나
스타트업 창업자들은 “기업이 성장할 땐 정부가 ‘실리콘밸리처럼 하라’고들 하지만, 정작 어려울 땐 ‘한국식으로’ 대응하길 바란다”고 입을 모았다. 투자금이 소진돼 존폐 기로에 서 있는데, 구조조정 대신 기존 직원의 재교육·직무 전환 등으로 대응하는 건 한계가 있다는 주장. 한 국내 대형 벤처캐피털(VC) 팀장은 “시스템과 자원이 풍부한 대기업과 달리 소규모 스타트업은 인력 재배치에 도리어 더 많은 비용이 든다”며 “현장에 맞는, 실효성 있는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업계에선 노사 갈등을 피하기 위해 ‘좋은 이별’을 고심하고 있다. 한국보다 해고가 자유롭다는 실리콘밸리에서도 사전 통보 없는 해고는 논란의 대상. 이 때문에 회사를 떠나는 직원들의 구직을 돕는 ‘아웃플레이스먼트(outplacement, 퇴사 직원에 대한 전직 지원)’에 나서는 기업들도 있다. 스타트업계에서도 해고하라는 통보 대신 직원에게 압박을 줘 알아서 퇴사하게 만드는 ‘조용한 해고(Quiet firing)’나, 정규직 대신 계약직만 뽑는 방식의 ‘조용한 고용(Quiet Hiring)’이 늘어날 거란 전망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