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참 좋아요" 손하트…까까머리 6살, 수천㎞ 필사의 탈출 [우크라이나 르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4면

 4일(현지시간) 폴란드 바르샤바의 난민 보호시설 글로벌 엑스포 난민 캠프에서 만난 다비드(6)는 ″한국 사랑해요!″라고 한국말로 말하면서 이전 한국인 봉사자와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바르샤바=김홍범 기자

4일(현지시간) 폴란드 바르샤바의 난민 보호시설 글로벌 엑스포 난민 캠프에서 만난 다비드(6)는 ″한국 사랑해요!″라고 한국말로 말하면서 이전 한국인 봉사자와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바르샤바=김홍범 기자

지난 3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키이우를 출발해 버스로 총 18시간을 달려 4일 오후 도착한 폴란드 바르샤바. 시내 거리와 쇼핑몰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우크라이나 국기였다. 폴란드 수도에 폴란드 국기와 함께 우크라이나 국기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지난해 3월 중앙일보가 이곳을 찾았을 당시 각종 문화시설과 레스토랑에 양국 국기가 함께 걸려 있던 모습 그대로였다. 그간 우크라이나를 적극 지원해 온 폴란드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이날 찾은 바르샤바의 한 우크라이나 난민 보호시설. 현재 1000명가량이 머물고 있다. 우크라이나 국기에 태극기를 비롯해 미국과 영국 국기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이 시설에 지원을 아끼지 않은 나라에 대한 감사를 표시하기 위해 해당국 국기를 걸어 놓았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인 직원 올가(36)를 따라 들어간 교실에서 만난 우크라이나 어린이들은 기자에게 안기며 한국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했다.

한국어로 이름 적은 6세 소녀

이곳 아이들에게 한국인은 “만나면 즐거운 사람”이다. 한국인 봉사단체가 매주 토요일 오전 아이들과 놀아주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날 오전에도 한국인 봉사자들이 다녀갔다. 우크라이나 중부 드니프로에서 지난해 4월 피난 온 6살 소녀 비우는 이마에 한국어 글씨로 자신의 이름을 적어 보여줬다. 다비드(6)도 서툰 한국말로 “한국이 너무 좋아요”라며 기자에게 엄지와 검지를 교차하는 ‘손 하트’를 꺼내 들었다. 한국인 자원봉사자에게 배운 인사법이다.

폴란드 바르샤바의 우크라이나 난민 보호시설 글로벌 엑스포에서 4일(현지시간) 만난 우크라 6살 소녀 비우. 이마에 한글로 자신의 이름 써 놨다. 바르샤바=김홍범 기자

폴란드 바르샤바의 우크라이나 난민 보호시설 글로벌 엑스포에서 4일(현지시간) 만난 우크라 6살 소녀 비우. 이마에 한글로 자신의 이름 써 놨다. 바르샤바=김홍범 기자

아이들의 천진한 웃음 뒤에는 슬픈 사연이 있었다. 우크라이나 남동부 마리우폴에 살던 다비드는 전쟁이 벌어지자 할아버지 알렉산드르(66)의 손을 잡고 지난해 5월 고향을 떠났다. 전쟁으로 길이 막히자 러시아 영토로 넘어간 뒤 에스토니아 등을 거쳐 바르샤바까지 수천 ㎞가 넘는 목숨을 건 탈출을 했다.

다비드 가족은 고향에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다비드의 할아버지 알렉산드르는 “전쟁이 끝나면 마리우폴이 멋지게 재건되는 모습을 보러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날이 언제 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차라리 이곳에서 먹고살 방안을 찾으려는 난민도 있다. 시설의 니키타, 폴리나, 크리스티나 3남매의 엄마 이리나(38)는 “아직 아이들이 어리고 언어가 다른 문제도 있지만, 그래도 아이들 안전이 우선”이라며 “전쟁이 끝나더라도 이곳에서 일을 구해 머무르고 싶다”고 말했다.

4일(현지시간) 폴란드 바르샤바 글로벌 엑스포 난민 캠프에 미국, 영국 국기와 함께 한국의 국기가 걸려있다. 이곳에서 일하는 올가(36)는 ″한국의 자원봉사자들이 자주 와 아이들이 매우 좋아한다″고 말했다. 바르샤바=김홍범 기자

4일(현지시간) 폴란드 바르샤바 글로벌 엑스포 난민 캠프에 미국, 영국 국기와 함께 한국의 국기가 걸려있다. 이곳에서 일하는 올가(36)는 ″한국의 자원봉사자들이 자주 와 아이들이 매우 좋아한다″고 말했다. 바르샤바=김홍범 기자

폴란드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생한 후 가장 많은 우크라이나 난민을 받은 나라 중 하나다. 유엔난민기구(UNHCR)에 따르면 지난달 31일 기준 전쟁 이후 총 933만명의 우크라이나인이 폴란드로 넘어갔다. 개전 초기 폴란드인들은 자신의 집에 우크라이나인들을 기꺼이 머무르게 하며 전쟁의 아픔을 어루만졌다. 현재도 156만명의 우크라이나 난민이 폴란드에 남아 있다.

악연에서 맹방으로 바뀐 양국

지난달 28일(현지시간) 폴란드 바르샤바의 한 쇼핑몰 내 식당에 폴란드 국기와 함께 우크라이나 국기가 걸려있다. 바르샤바=김홍범 기자

지난달 28일(현지시간) 폴란드 바르샤바의 한 쇼핑몰 내 식당에 폴란드 국기와 함께 우크라이나 국기가 걸려있다. 바르샤바=김홍범 기자

난민 수용 외에도 폴란드는 가장 적극적으로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나라다. 전쟁 초기 소련 시절 주력 전차인 T-72를 대거 제공한 데 이어 올해 들어선 자국 내 보유 중인 레오파르트2 전차를 제조국인 독일 승인 없이 우크라이나에 지원하겠다고 나서며 독일도 전차를 우크라이나에 지원하라고 압박했다. 지난해 12월 러시아의 추적을 피해 미국을 비밀리에 방문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귀국길에 만난 정상도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이었다. 지난 17세기 폴란드가 우크라이나 서부를 지배하고, 20세기 2차 대전 시절엔 우크라이나에서 폴란드인이 학살당했던 양국의 악연을 생각하면 상전벽해나 다름없다.

공통의 적인 러시아가 두 나라를 맹방으로 만든 것이다. 이번 러시아 침공으로 우호 관계가 한층 깊어지는 모습이다.

폴란드 “우크라 돕고 싶다”…“전쟁 빨리 끝났으면” 

지난달 28일(현지시간) 폴란드 바르샤바의 길거리 벽에 우크라이나와 폴란드의 국기가 나란히 붙어있다. 바르샤바=김홍범 기자

지난달 28일(현지시간) 폴란드 바르샤바의 길거리 벽에 우크라이나와 폴란드의 국기가 나란히 붙어있다. 바르샤바=김홍범 기자

바르샤바에서 만난 폴란드인들도 여전히 우크라이나를 돕고 싶다고 말했다. 폴란드 남성 라덱(51)은 “폴란드인 대부분은 러시아의 부당한 침공에 맞선 우크라이나 국민을 지지하고 있다”며 “폴란드에서 일하는 우크라이나인이 늘면서 폴란드의 노동력 부족 현상을 해소해 주는 긍정적인 영향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전쟁 이전에도 우크라이나인들이 직업을 구하러 많이 폴란드로 들어와 전쟁 이후에는 훨씬 가까워졌다고 느낀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이날 바르샤바의 마트 등에서는 직원들이 우크라이나어를 쓰는 모습이 포착됐다.

단 어려움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는 40대 폴란드 여성은 “우리가 우크라이나를 도우면서 인플레이션이 심해졌다”며 “예전엔 집에 있던 인형 하나까지 나누고 싶었지만, 이제 지치는 것도 사실”이라고 전했다. 폴란드 여성 마제나(48)도 “전쟁 이후 부동산 임대료가 폭등했다”며 “어려운 우크라이나인을 돕는 건 맞지만 빨리 전쟁이 끝났으면 하는 게 솔직한 심정”이라고 말했다.

'러·우크라 전쟁 1년' 디지털 스페셜 만나보세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1년을 맞아 중앙일보가 2월 1일부터 디지털 아카이브 페이지를 오픈했습니다. 전쟁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이 비극에 끝은 있는지, 서방의 우크라이나 지원과 러시아의 맞대응 등 지난 1년의 기록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디지털 아카이브 보기 ☞ https://www.joongang.co.kr/digitalspecial/479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