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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문병주의 시선

혐오정치의 끝은 어디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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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문병주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문병주 논설위원

문병주 논설위원

쉽고도 효과가 뛰어나다. 혐오를 드러내는 글ㆍ발언ㆍ행위의 유혹은 그래서 마약 같고 금단 현상도 강한 듯하다. 이를 지양하겠다는 정치인들의 약속 역시 같은 이유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힘들다.

지난달 30일 국회의원 131명이 참여하는 ‘초당적 정치개혁 의원모임’이 출범했다. 극단적 대립ㆍ혐오의 정치를 극복하겠다는 목표를 앞세웠다. 김진표 국회의장과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이정미 정의당 대표 등 여야 지도부가 모두 참여했다. 이런 모임이 만들어진 자체는 고무적이다. 정치에 대한 국민 불신이 나날이 커지는 가운데 어떻게라도 관심을 끌어보겠다는 문제의식이 보였다. 향후 선거제도 개선이나 헌법 개정을 통한 통치제도 개혁을 이뤄내기 위한 시발점이 될 것이라는 해석도 있었다.

하지만 1주일도 되지 않아 그저 보여주기식 행사 몇 번 계속할 것 같다는 예상이 감돈다. 지난 4일 더불어민주당이 서울 숭례문 일대에서 ‘윤석열 정권 민생파탄ㆍ검사독재 규탄 대회’를 열었다. 방점은 이재명 대표를 향하고 있는 검찰 수사에 있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 방탄용” “제2의 조국사태”라는 대응 경고가 나왔다. 단상에 오른 정치인들의 발언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엔 또다시 찬반을 앞세운 혐오스러운 표현이 실렸다.

앞서 민주당 내부에서는 이 대표의 강성 지지층들이 언론 게시판에 올린 ‘민주당 의원들 검찰 방문 및 발언 SNS 전수조사’란 제목의 게시글이 논란이 됐다. 민주당 의원 169명을 가나다순으로 나열하고 이 대표가 지난달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했을 때 동행했는지와 검찰 관련 비판 발언 여부를 항목별로 ‘O 또는 X’를 명기한 표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의원실과 의원 휴대전화에 문자 폭탄이 더해졌다. 지역별 참여 인원 할당과 같은 장외집회 총동원령이 가운데 이 대표마저 “진정한 동지라면 내부 향한 비난ㆍ공격 오히려 말려주셔야…”라며 진화에 나서기도 했다.

초당적 정치개혁 모임 지지부진
‘욕설정치'에 정치양극화 깊어져
중도가 사라진 팬덤정치의 폐해

‘개혁의 딸(개딸)’과 같은 이 대표 강성 지지자들은 지난 대선을 거치면서 이 대표 이외의 정치 세력을 적대시하는 팬덤 정치를 더욱 공고히 만들었다. 대표적 표출은 온라인 댓글이다. 지난달 31일 성균관대와 한국언론학회가 연 ‘온라인 혐오 표현과 정치’ 주제 세미나에서 이재국 성균관대 교수팀은 20대 대통령 선거 당시 주요 포털 뉴스 댓글에 나타난 모욕과 멸시, 증오 선동 현상을 분석해 발표했다. 댓글 내용이 남아 있는 약 2700만건 중 약 1400만건에 이런 혐오 표현이 담겼다. 윤석열 당시 대통령 후보의 경우 ‘쥴리’ ‘국짐당’ 등 자신보다 배우자 또는 소속 정당과 관련된 글이 다수였고, 이재명 후보는 ‘이죄명’ ‘찢개명’ 등 전과 또는 욕설과 관련된 내용이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대선 후보자 경선 과정에서도 이재명 후보 지지자들은 이낙연 후보 지지자들을 ‘문파’ ‘똥파리’ ‘수박’이라고 지칭하는 혐오적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수박 표현의 경우 5ㆍ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두고 극우 성향 커뮤니티들을 중심으로 호남을 비하하는 표현으로 사용돼 논란이었다.

팬덤 정치와 뗄 수 없는 혐오 정치의 책임은 결국 정치인들이 져야 한다. 팩트 확인도 제대로 하지 않고 ‘청담동 술자리 의혹’을 제기한 김의겸 민주당 의원, 김건희 여사가 캄보디아에서 심장병을 앓는 어린이의 집을 방문한 것을 ‘빈곤 포르노’라고 지칭한 장경태 민주당 의원도 너무 쉬운 선택을 해버렸다. 윤 대통령과 김 여사에 대한 혐오를 부추겨 그 반사이익을 얻으려는 선동이나 다름없었다.

1심에서 자녀 입시 비리와 관련해 대부분 유죄판결을 받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사건도 마찬가지다. 검찰 수사에 대해 사실관계가 어찌 된 것인지 상관없이 정치적 이익을 앞세워 감정에 호소하는 혐오적 표현들로 ‘조국 수호’에 시민들을 서울 서초동 거리로 불러 모았던 상황을 되돌아봐야 한다. 직장 동료는 물론 가족 식사 자리에서 얼굴을 붉히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반민주적이고 생각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던 혐오적 분위기는 어땠나.

중도 세력의 운신 폭이 좁은 정치 양극화는 혐오 정치를 부추긴다. 그러면서 중도적 목소리를 더욱 사장하는 악순환이 확대된다. 강성 지지자들만이 득세하는 한국 정치의 현실이다. 이재명 대표에 대한 검찰 수사가 더 진행될수록, 총선이 다가올수록 시민들은 극단의 정치적 선택을 요구하는 혐오적 목소리에 시달릴 가능성이 크다. 혐오 정치 퇴출을 기치로 닻을 올린 초당적 정치개혁 모임의 취지가 무색해지지 않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