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 때는 ‘세계 기준’ 줄일 땐 ‘한국식’…스타트업 고용 딜레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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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5면

클 때는 ‘글로벌 스탠다드’, 불경기엔 ‘한국 기업’.

한국 스타트업 창업자가 처한 딜레마다. 글로벌 큰손의 투자를 받고 ‘실리콘밸리처럼’을 꿈꾸며 성장해온 국내 스타트업계가 ‘혹한기’를 맞아 노동 유연성이 떨어지는 한국에서 조직·사업 재정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고금리·고물가·엔데믹 폭격에 정보기술(IT)·게임 업계에도 구조조정 칼바람이 분다. 지난해 12월 국내 최대 유튜버 소속사(MCN) 샌드박스네트워크는 일부 직원 권고사직을 통보했고, 패스트파이브·뤼이드·정육각 등 누적 1000억원 이상 투자받은 업체마저 최근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구글·아마존·메타 같은 미국 빅테크도 전체 직원의 6~13%가량을 해고하는 대대적 감원 절차에 돌입했다. 그러나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최근 해고된 미국 테크 근로자의 79%는 해고 3개월 내에, 37%는 한 달도 못 돼 재취업에 성공했다. 실리콘밸리 기업의 ‘쉬운 해고’가 사회적 갈등으로 번지지 않는 배경이다.

한국 상황은 다르다. 기업 생존을 위해선 사업 축소나 방향 전환(pivoting·피보팅)이 필요하지만 고정된 인력을 재배치하기도 쉽지 않다. 스타트업 창업자는 “내보낼 직원을 일대일로 만나서 다 설득하느라 회사의 모든 자원과 정신적 비용까지 동원되는 상황” “당장 일감이 없어 유튜브를 보는 직원에게 제발 나가달라 사정해도 ‘이직처가 확정되면 나가겠다’는 답이 돌아온다”라고 말한다. 최근 조직 규모를 절반으로 줄인 한 스타트업 대표는 “이 과정에서 남은 자금과 에너지를 다 소진하고 결국 폐업하는 스타트업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투자자를 이해시키기도 쉽지 않다. 창업 10년 차인 한 글로벌 스타트업 대표는 “불경기 때 해고가 안 된다는 점을 외국 투자자가 이해하지 못해서 설득하는 데 애로 사항이 있었다”고 말했다. IT·게임업계는 현업에서 필요로 하는 기술이나 시장의 유행이 빠르게 변한다.

예를 들어 게임 산업 지향점이 모바일·캐주얼 게임에서 콘솔·고사양 게임으로 옮겨가면 인력 구조도 바뀌어야 한다. 게임 업계서 프로젝트성으로 팀을 모았다 해체하는 특성이 두드러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람은 많은데 정작 사업에 필요한 인력은 없는 현상은 빈번하다.

한국 기업은 경영난을 맞더라도 작업방식 합리화나 일시휴직·희망퇴직·전근 등 직원의 해고를 회피할 수 있는 노력을 먼저 기울여야 한다. 기존 직원의 직무 재교육이나 부서 재배치를 통한 인력 재편도 이에 해당한다.

스타트업 창업자는 “성장할 땐 ‘실리콘밸리처럼 하라’고들 하지만, 정작 어려울 땐 ‘한국식으로’ 대응하길 바란다”고 입을 모았다. 투자금이 소진돼 존폐 기로에 서 있는데, 구조조정 대신 기존 직원의 재교육·직무 전환 등으로 대응하는 건 한계가 있다는 주장이다. 한 국내 대형 벤처캐피털(VC) 팀장은 “시스템·자원이 풍부한 대기업이라면 가능하겠지만, 소규모 스타트업은 도리어 재배치가 더 많은 비용이 든다”며 “현장에 맞는, 실효성 있는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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