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8시간 연습했다…조성진, 바흐 아닌 헨델에 빠진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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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이치그라모폰(DG)에서 여섯 번째 정규 앨범 '헨델 프로젝트'를 최근 발매한 피아니스트 조성진. 사진 유니버설 뮤직

도이치그라모폰(DG)에서 여섯 번째 정규 앨범 '헨델 프로젝트'를 최근 발매한 피아니스트 조성진. 사진 유니버설 뮤직

피아니스트 조성진(28)이 도이치그라모폰(DG)에서 여섯 번째 정규 앨범 ‘헨델 프로젝트’를 발매했다. DG에서 나온 조성진의 첫 음반은 2015년 쇼팽 콩쿠르 우승 실황앨범이었다. 이후 2016년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과 발라드, 2017년 드뷔시, 2018년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과 소나타, 2020년 슈베르트 ‘방랑자’, 2021년 바리톤 마티아스 괴르네와 바그너·피츠너·슈트라우스 가곡집, 그리고 같은 해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과 스케르초가 차례로 발매됐다. 조성진은 그로부터 2년 만에 나온 ‘헨델 프로젝트’ 앨범에서 최초로 바로크 시대 작곡가를 다뤘다. 조성진을 지난 4일 온라인으로 만났다.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협연하고, 시애틀과 로스앤젤레스, 프랑크푸르트 등에서 리사이틀을 하고 돌아왔다는 그는 “재작년 가을부터 팬데믹 이전으로 돌아간 것 같다. 바쁜 게 좋다. 살아있는 느낌”이라고 근황을 밝혔다.

6번째 DG 앨범에 헨델 하프시코드 모음곡 담아 #“태어나서 가장 많이 연습한 팬데믹 기간의 선물” #세계 각국 연주 여행하며 K클래식의 성장 느껴 #도시마다 내 청중 1000~2000명 있으면 감사

조성진은 코로나로 자신의 음악 세계가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며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집중할 수 있었다고 했다. “악보를 구입해 혼자 오랫동안 연주하는 시간을 보냈다”는 그는 “헨델 작품이 마음에 와 닿아서 녹음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바로크 작곡가 중 건반악기로 연주되는 작품은 바흐가 압도적으로 많다. 그럼에도 조성진이 첫 바로크 음반의 작곡가를 헨델로 고른 이유는 무엇일까.

“아직 바흐를 녹음하거나 연주할 준비가 안 됐어요. 바흐가 이지적이고 복잡한 데 비해 헨델은 가슴에서 나오는 멜로디가 느껴졌죠. 처음 시작할 때는 헨델 쪽이 비교적 용이하다고 생각했는데 헨델 역시 공부해보니 만만치가 않더군요.”

조성진의 DG 앨범 '헨델 프로젝트' 재킷. 앨범을 내는 첫 바로크 시대 작곡가로 헨델을 선택했다. 사진 유니버설 뮤직

조성진의 DG 앨범 '헨델 프로젝트' 재킷. 앨범을 내는 첫 바로크 시대 작곡가로 헨델을 선택했다. 사진 유니버설 뮤직

조성진은 어린 시절 영재아카데미에 다닐 때 ‘피아노의 구약과 신약으로 불리는 바흐 평균율 클라비어곡집과 베토벤 소나타 전곡을 20대가 가기 전에 연주하는 게 좋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제 이해가 간다고 했다. “바흐는 손에 익숙해지고 자신 있게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 30대 전까지는 힘들 것 같고 40대 전에는 바흐 평균율과 베토벤 소나타 사이클을 완주하고 싶습니다.”

조성진은 이번 헨델 음반 녹음을 위한 준비작업을 “태어나서 가장 많이 연습했던 시간들”이라고 회상했다. 작년 6월 투어 취소 뒤 한 달 동안 집에서 매일 8시간가량 연습했다고 한다.

음반에는 1720년 런던에서 출판된 헨델의 하프시코드 모음곡 1권 중에서 조성진이 가장 아끼는 세 곡인 2번 HWV427, 8번 HWV433, ‘흥겨운 대장장이’로 유명한 5번 HWV430이 수록됐다. 모음곡 2권 중에서는 7번 HWV440 중 세 번째 악장 사라방드 B플랫장조와 빌헬름 켐프가 편곡한 1번 HWV434 중 미뉴에트 G단조가 담겼다.

“바로크 모음곡은 알르망드, 사라방드 같은 옛날 춤곡들로 이뤄졌죠. 너무 정박자로 연주하면 춤추기 힘들어요. 타이밍을 맞추는 장식음이 중요합니다.”

조성진은 작년 녹음을 앞두고 임선혜와 연주한 스위스 하프시코드 연주자 세바스티안 비난트를 만나 레슨을 받고 조언을 구했다. “하프시코드는 현을 뜯고 피아노는 해머로 현을 치죠. 작동법이 완전히 다른 악기였어요. 작년 5월에 밤베르크에 연주하러 갔을 때 악기 창고에 하프시코드가 많아서 쳐봤는데 생각보다 훨씬 까다롭더라구요. 반면 현대 피아노는 장점이 많습니다. 다양한 표현이 용이하죠. 물론 작곡가가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악보의 표시도 훨씬 적어서 해석의 폭도 넓고요. 이번에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쪽으로 해석했어요.”

조성진은 작품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서스테인 페달의 사용을 자제하면서 강약을 조절했고 특유의 음색으로 각 성부를 투명하게 제시했다. 그래선지 하프시코드의 차가운 느낌 대신 피아노의 온기가 듣는 이에게 푸근하게 다가온다. 녹음 장소인 베를린의 지멘스 빌라도 피아노의 울림에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성진이 2017년 드뷔시 작품을 녹음했었던 곳이다.

“홀의 울림이 과다하지 않아서 헨델을 표현할 때 어렵지 않았어요. 바로크 작품을 녹음하기엔 교회가 더 좋을 수 있겠지만 제게는 아티큘레이션(각 음을 분명하고 명료하게 연주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모든 성부를 듣고 조절하기 용이하다는 점이 좋았어요. 드뷔시 녹음 때는 페달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장점이 있었죠.”

조성진은 바로크 음악가 가운데 건반악기로 연주되는 작품이 압도적으로 많은 바흐를 두고 헨델을 녹음한 데 대해 "바흐는 아직 준비가 안 됐다. 헨델은 가슴에서 나오는 멜로디가 느껴졌다"고 했다. 사진 유니버설 뮤직

조성진은 바로크 음악가 가운데 건반악기로 연주되는 작품이 압도적으로 많은 바흐를 두고 헨델을 녹음한 데 대해 "바흐는 아직 준비가 안 됐다. 헨델은 가슴에서 나오는 멜로디가 느껴졌다"고 했다. 사진 유니버설 뮤직

앨범에 함께 수록된 브람스 ‘헨델 주제에 의한 변주곡’은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선곡이다. 브람스가 헨델 모음곡 3번 B플랫 장조 HWV434의 아리아를 바탕으로 쓴 스물다섯 개의 변주곡이다. 조성진은 “브람스가 천재적으로 쓴 푸가와 장인적인 기교가 엮인 이 곡은 마치 큰 산에 올라 정상에 도달하는 것처럼 도전적이다. 그만큼 연주 만족감도 크다”고 했다.

이번 음반의 마지막 곡인 빌헬름 켐프 편곡 헨델 ‘미뉴에트 G단조’에서 조성진은 많은 사람에게 여운을 남길 만한 연주를 들려준다. “몇 년 전 발견하고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는 조성진의 말대로 슬픔과 아름다움의 접점을 촉촉한 감성으로 전달한다.

조성진은 쇼팽 콩쿠르를 준비하던 2013년부터 본인의 연주 동영상을 찍어 되돌려 보면서 점검하고 연습했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는 연주 촬영을 그만뒀다고 한다. “내가 친 걸 보면서 교정하겠다는 발상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음악이 인위적이고 살아있는 느낌을 못 받을 때가 있어서 요즘은 안 해요. 연주 여행을 하며 바삐 지내면 살아있는 것 같고 쓸모 있는 느낌이 들어 좋습니다. 새로운 걸 배우면서 희열을 느껴요.”

조성진은 세계를 누비며 겪었던 이런저런 일들을 얘기했다. 미국 투어 때는 베를린에서 파리를 경유해 샌프란시스코로 향했는데 짐을 분실해 운동화를 신고 첫 연주회에 임했다. “다음날부터는 정장을 빌렸어요. 보스턴에서는 친구인 피아니스트 신창용의 옷을 빌려 입었죠.”

최근 가장 감동적인 순간으로 지난해 2월 카네기홀 공연을 꼽았다. 야닉 네제 세겐이 지휘한 빈 필하모닉 공연에 데니스 마추예프의 긴급 대타로 투입돼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2번을 연주했다. “3년 동안 안 치던 곡이었는데 밤새 연습한 다음 날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코로나 검사를 받은 결과 음성이 나와 좋았죠. 긴장을 많이 해서 리허설 공연이 기억이 안 날 정도였어요. 끝나고 야닉과 포옹을 했는데 무사히 마쳤다는 느낌과 함께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평소 조성진은 언제 행복을 느낄까. “연주 투어 마치고 돌아와 집에서 쉬면서 새로운 악보를 익히거나 드라마나 영화 볼 때”라고 소개했다. 최근에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를 재미있게 봤다고 했다.

날마다 시간이 너무 빨리 가버린다는 조성진은 “하루가 30시간이면 좋겠다”며 “그러면 연습도 휴식도 충분히 하고 시차 적응도 빨리 될 것 같다. 한국에 오면 시차 때문에 다음날이 돼버리곤 한다”고 말했다.

1년 전부터 K 클래식의 성장을 피부로 느낀다는 조성진은 콩쿠르 자체를 싫어하지만 “콩쿠르에서 입상해서 연주 기회가 생기고 매니지먼트에 들어가는 게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이라 생각한다”며 한국인들이 콩쿠르에 참가하는 데 긍정적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유명한 오케스트라나 연주자보다는 마음이 맞고 음악적으로 잘 맞는 악단이나 연주자와 함께하고 싶다”며 “예전에 내 공연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도시마다 1000, 2000명 정도만 있으면 감사할 것 같다고 했는데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없다”고 말했다.

조성진은 이번 ‘헨델 프로젝트’ 앨범의 프로그램으로 전 세계 투어에 나선다. 5일 리사이틀을 시작해 하노버·뒤셀도르프·함부르크·도르트문트·런던·밀라노 등에서 리사이틀을 갖는다. 한국에서는 3월 정명훈 지휘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와 협연 무대, 7월 리사이틀이 예정돼 있다.

류태형 객원기자·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ryu.taeh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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