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REPORT

세르히 쿠잔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는 공습경보가 울리지 않을 땐 여느 도시와 별반 다르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마이단 광장 등 주요 공공장소에 무장 군인들이 수십m 간격으로 배치돼 경계 중이란 점이다. 도시 곳곳의 그라피티(벽화)도 눈에 띈다. 우크라이나 군인이 서방제 대전차 미사일을 발사하는 벽화 옆으로 시민들이 무심하게 지나갔다. 인근 도시 이르핀을 방문했을 때도 포격당한 아파트 외벽에 발레를 하는 아이와 우크라이나 국기가 그려져 있었다. 전쟁 승리와 일상 회복을 함께 바라는 우크라이나 국민의 간절한 바람이 읽혔다.
2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시내에서 만난 세르히 쿠잔(사진) 우크라이나 국방부 고문도 승리에 대한 염원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르키우 출신의 변호사로 군사 분야 싱크탱크인 안보협력센터 창설자인 그는 2014년 유로마이단 혁명 이후 우크라이나 국가안보회의 고문을 지낸 군사 전문가다. 남부 헤르손 등 최전방을 살피고 막 돌아왔다고 했다. 쿠잔 고문은 “전황을 타개하려면 적(러시아)의 지휘부와 보급 창고를 타격할 무기가 필요하다”며 “우리가 전투기와 사거리 100㎞ 이상의 미사일을 간청하는 건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라고 힘줘 말했다.
- 이번 전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
- “21세기판 러·일 전쟁(1904~05)이 될 거다. 당시 제정러시아는 일본에 패한 뒤 무너졌고 니콜라이 2세는 최후의 차르가 됐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얕보고 시작한 이번 전쟁에서 우리가 승리하면 러시아 권위주의 정권의 몰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는 국제사회에도 매우 의미 있는 사건이 될 것이다.”
- 치열한 공방이 계속되고 있는데.
- “현재까지 수집된 모든 정보를 종합할 때 조만간 러시아군의 총공세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각 전선에 병력을 집결시켰고 전쟁 물자도 총동원 중이다. 통상 대규모 공격 전의 준비 상황이다. 또 발레리 게라시모프 러시아 총참모장이 지난달 초 새로 부임한 뒤 전선에도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동쪽에 공수부대가 집결했고 바그너 용병 그룹 일부는 남부 전선으로 이동했다. 공격 시점은 이르면 2월 중순이 될 수 있다. 전차 등 서방 무기가 도착하기 전을 노릴 거다.”
“러, 병력 잃어도 상관 않는 옛 소련식 공격”
- 미국과 독일이 전차 지원을 승인했는데.
- “(탱크 지원은) 엄청난 도움이며 너무 감사한 일이다. 다만 그 자체로 전환점을 만들진 못한다. 현시점에서 정말 필요한 건 전투기와 장거리 미사일이다. 조만간 러시아의 대공세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절박한 상황이다.”
- 우크라이나의 준비 상황은.
- “러시아의 총공세가 전선을 뚫을 수 있을까? 우리는 아니라고 본다. 러시아는 미사일도, 숙련된 병사도 부족한 상태다. 다만 잘 훈련된 신병이 대규모로 투입될 수 있다는 게 위협 요소다. 지금 러시아는 병력을 잃어도 신경 쓰지 않고 밀어붙이는 옛 소련식 전술을 그대로 쓰고 있다. 이를 막으려면 (우크라이나 영토의) 후방에 있는 러시아 지휘부를 타격해야 한다. 장거리 미사일과 전투기가 그래서 꼭 필요하다.”
- 당장 해결할 과제가 있다면.
- “길어진 전선을 줄이는 게 급선무다. 동부 돈바스 지역부터 크림반도까지 이어진 러시아의 육로 회랑을 끊는 것도 중요하다. 육로를 통한 러시아 보급로만 막는다면 크림반도 수복까지 가능해질 것이다.”
- 전쟁이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 “개전 후 1년간 우리는 충분한 무기 지원만 있다면 얼마든지 잘 싸울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개전 초기 우리에게 스팅어 대공 미사일과 재블린 대전차 미사일 등 게릴라성 무기를 주던 서방이 이젠 전차 등 중무기를 주고 있지 않나. 다만 지금의 무기만으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한국을 포함한 더 많은 나라가 우리를 도와야 전쟁이 끝난다.”
인터뷰를 마친 뒤 쿠잔 고문은 “기사에 사무실 위치를 노출하지 말아달라”고 거듭 당부했다. 보안상의 이유다. 현재 우크라이나 국방부 관료들은 한자리에 모이지 않고 각기 다른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했다.
우크라이나 현지에서 만난 시민들도 국제사회의 무기 지원을 한목소리로 호소했다. 개전 초 의용병으로 총을 들었다는 제냐(30)는 “곧 동부 전선에 지원 물품을 전달하러 갈 예정”이라며 “우리에게 더 필요한 건 무기뿐이다. 용기와 승리에 대한 염원은 충분하다”고 말했다.
키이우 시내 카페에서 만난 니콜라이(25)는 최근 서방이 지원을 약속한 독일제 레오파르트2 전차와 미국제 에이브럼스 전차를 반기는 시민들 모습이 담긴 영상을 보여줬다. 80만 회가량 재생된 이 영상이 올라온 계정 이름은 ‘세인트 재블린(Saint Javelin)’. 이번 전쟁에서 활약한 미제 재블린 대전차 미사일이 마치 수호성인 같다며 붙인 별명이다. 니콜라이는 “우크라이나인들은 이런 영상을 보며 전쟁의 공포를 이겨내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