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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우크라 전쟁 1년, 국제정치 구도 격변] 국운 건 러시아 vs 퇴로 없는 우크라, 길고 지루한 소모전 끝낼 해법이 안 보인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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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5호 08면

SPECIAL REPORT 

푸틴, 젤렌스키, 바이든(왼쪽부터 순서대로)

푸틴, 젤렌스키, 바이든(왼쪽부터 순서대로)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지 1년이 돼 가지만 우크라이나의 유로마이단 혁명을 계기로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병합하며 시작된 돈바스 전쟁부터 따진다면 이 전쟁은 10년째로 접어들고 있다. 이 오랜 갈등의 시간을 통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원하던 바를 각각 얼마나 이뤄냈을까.

당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서 고조된 민족주의에 반발해 분리주의 운동에 나선 돈바스 반군을 지원하며 우크라이나 동부를 분쟁 지역화한 뒤, 이를 민스크 협정으로 관리함으로써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을 저지하려 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의 군사적 저항에 직면해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결국 ‘자신의 우크라이나’를 과거와 같은 식으로 자국 세력권에 묶어 두기 위해 노골적인 폭력 동원이란 민낯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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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또한 러시아와의 고리를 끊고 유럽 멤버십을 획득하기 위해 매진해 왔지만 러시아와의 직접 충돌이 현실화되면서 엄청난 국민적 희생과 영토의 상실 및 황폐화로 고통받고 있다.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에 따르면 지난 1년 새 우크라이나 민간인 사상자는 1만8000명을 넘어섰다. 양국 군인 사상자도 각각 1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기나긴 갈등이 전면전으로 비화하면서 두 나라 모두 원치 않았던 비극적인 현실과 맞닥뜨리게 된 셈이다.

#전쟁의 구도와 중간 평가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지원하기로 한 M1 에이브럼스 전차. [EPA=연합뉴스]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지원하기로 한 M1 에이브럼스 전차. [EPA=연합뉴스]

나토 중심의 안보 구조에 편승한 가운데 러시아의 값싼 가스를 공급받아 경제성장과 탈탄소 경제 건설을 지향해 온 서부 유럽 주요국들도 적절한 대응책을 찾지 못하고 있는 건 마찬가지다. 오히려 미국의 우크라이나 직접 지원으로 중간국 외교가 난망해지면서 미·러 대립 구도에 일방적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일각에선 러시아 혐오증(Russophobia)도 확산되는 모습이다. 유럽의 안보적 자율성이 한계를 드러냈다는 평가도 곁들여진다.

미국은 탈냉전 이후 러시아를 지속적으로 약화시키려는 네오콘 중심의 강경파들과 러시아를 잘 관리해야 한다는 현실주의자 간의 이견과 대립을 일정 정도 조율하며 대러 외교의 균형을 유지해 왔다. 한편으론 러시아의 지속적인 반발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조지아 등의 나토 가입 추진을 통해 러시아의 약한 고리를 공략하는 전략을 지속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이에 맞서 러시아는 미국과 유럽의 유례없이 강력한 경제 제재에 직면해 중국과의 전략적 협력을 강화하는 등 국운을 건 싸움을 수행하고 있다. 주목할 점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통제권 확보라는 목표를 넘어 점차 흔들리는 국제질서의 틀 속에서 미국의 리더십을 약화시키기 위해 중국·사우디아라비아·인도 등 브릭스(BRICS)와 오펙플러스(OPEC+),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 국가들과의 연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 같은 합종연횡이 미·중 전략 경쟁과 맞물리면서 향후 국제정치 구도를 어떻게 변화시킬지도 예의 주시해야 할 주요 변수로 꼽힌다.

우크라이나 병사가 재블린 대전차 미사일을 조준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우크라이나 병사가 재블린 대전차 미사일을 조준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국제경제에도 적잖은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러시아의 경우 서방 제재에 대한 총력 대응과 새로운 교역 구조 정비 등을 통해 단기적으로는 안정세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막대한 전비로 인해 경제적 부담이 날로 커지는 상황에서 최대 경제 파트너였던 유럽과의 관계마저 파탄 나면서 국제정치·경제적으로 고립된 현실을 타개해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됐다. 전쟁 결과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서방과 밀착된 우크라이나발 안보 위협을 온전히 제거할 수 있을지도 불확실해 보인다. 북서부 국경에 인접한 핀란드 등 중립국이 등을 돌리고 러시아에 대한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안보 불안이 고조된 점도 뼈아픈 손실이다.

유럽 각국도 러시아의 저렴한 에너지와 대러시아 투자의 높은 수익 혜택을 누려왔지만 이번 전쟁으로 에너지 안보의 재구조화라는 과제는 물론 산업 생산력에도 적잖은 타격을 입게 됐다. 러시아를 더 이상 ‘시장 평화(market peace)’ 논리로 다루기도 힘들어졌다. 여기에 나토의 재무장화 등 안보 부담마저 가중되면서 경제와 안보라는 두 개의 핵심 분야에서 큰 난제를 풀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됐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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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미국은 이번 전쟁을 통해 러시아를 약화시키면서 유럽 동맹국들과 러시아의 연계 고리도 끊고 서방 진영에 대한 강한 영향력까지 회복하게 됐다는 점에서 거둔 성과가 적잖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 수호라는 명분으로 시작한 우크라이나 지원이 러시아의 소모전·지구전 전략으로 인해 급속히 늘고 있다는 게 부담이다.

더 나아가 전쟁이 더 장기화될 경우 국제질서의 불안정성이 높아지고 이는 서방의 연대를 약화시키는 동시에 중국만 이롭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면서 결국 미국이 중국과의 전략 경쟁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들 것이란 우려도 만만찮다.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우크라이나·조지아·벨라루스 등을 활용하는 전략을 제안했던 랜드 연구소가 최근 보고서에서 “미국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를 막고 전쟁의 단계적 종식을 위한 조치들을 취해야 한다”고 제안한 건 이런 점에서 매우 의미심장하다.

결국 전쟁이 1년이나 지속되면서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당사자들 모두의 부담이 급속히 늘고 있는 모습이다. 그럼에도 전쟁 종식을 위해 적극 나서야 할 유럽의 입지는 줄어들었고, 국가 존폐의 위기 상황에서 우크라이나는 물러설 곳이 없으며, 국운을 건 전쟁을 벌이고 있는 러시아도 마찬가지인 상황에서 전쟁은 좀처럼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전쟁을 마무리할 명분을 찾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점이다. 한 가지 분명한 건 모든 전쟁은 협상 테이블에서 끝날 수밖에 없고, 그 결과는 전장의 현실을 싸늘하게 반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전쟁의 전망

대리전으로 엮어진 3중 전쟁(서방·러시아, 러시아·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반군)의 다층적 구조를 띠고 있는 이번 전쟁에는 원인과 과정 또한 복잡하게 작용하고 있다. 국제사회에서도 우크라이나를 지원해 악을 응징함으로써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정의 진영(Justice Camp)’과 전쟁의 지속은 큰 희생을 낳을 뿐인 만큼 전쟁을 멈추고 외교로 난제를 풀어야 한다는 ‘평화 진영(Peace Camp)’ 간의 논쟁이 가열되고 있다. 그만큼 해법 마련이 쉽지 않다는 의미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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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의 선택지는 매우 좁다. 많은 영토를 추가로 잃은 현실 속에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국민의 고통과 분노 사이에서 타협적 퇴로를 찾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가 타협하려는 순간 힘을 잃을 수 있다. 지난해 2월 이전으로의 복귀 같은 타협안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서방의 제한적 무기 지원은 우크라이나의 선전을 응원하는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다. 서방의 지원 확대와 직접적 개입 없이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제압하긴 역부족이다. 러시아의 핵 억지력 때문에 나토의 전면 개입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다.

러시아는 국내적 악영향을 최소화하면서 제한된 자원을 투입하는 지구전을 통해 상대의 항복을 받아내려는 전술을 지속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에 비해 러시아엔 몇몇 선택지가 있어 보인다. 일단 현재 합병한 4개 주를 러시아 영토에 귀속하는 선에서 휴전하는 안이다. 우크라이나는 이에 동의하지 않고 국제 여론에 호소할 것이다. 여의치 않을 경우 러시아는 전쟁을 더욱 확대해 오데사·하리코프 등의 노보로시야(새로운 러시아) 편입을 실현하려 할 수도 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이는 길고 지루한 전투의 지속을 의미한다. 전투의 승패는 경제적 지속력과 병참 보급이 결정하게 된다. 경제적으로 러시아가 범서방의 지원을 넘어서기엔 역부족이지만 일정 수준의 지구전을 수행할 능력은 확보 가능한 상황이다. “시간은 우크라이나 편이 아니다”는 콘돌리자 라이스 전 미 국무장관의 진단에 국제사회의 이목이 쏠리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결국 해법의 실마리는 밖에서 찾아질 수밖에 없어 보인다. 유럽이 외교적 해결에 기여할 가능성은 크게 줄었고 이스라엘이나 튀르키예의 중재 노력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의 입장이 무엇보다 중요해지고 있다. 군산 복합체와 에너지 산업, 네오콘·네오리버럴의 반러 연대가 막대한 우크라이나 지원의 기반이 되고 있는 데 비해 아슬아슬하게 하원 다수당이 된 공화당이 우크라이나 지원을 얼마나 줄일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어쩌면 미국이 러시아엔 더 강력한 제재를, 우크라이나엔 무기 지원 축소를 시사하며 양측을 동시에 압박한다면 전쟁 종식을 위한 회담이 재개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유리한 조건을 확보하기 위해 협상이 마무리될 때까지 전투는 더 가열될 수 있으며, 한국전쟁에서 봤듯이 이 과정은 꽤 긴 시간을 끌 수도 있다.

#협상으로의 복귀

최근 전황과 관련해 국제사회가 우려하는 부분 중 하나는 지난해 가을 우크라이나의 반격이 거둔 성과가 러시아의 병력 증원 이후 점차 상쇄되면서 젤렌스키 대통령이 서방의 보다 적극적인 무기 지원을 요청했고, 이에 미국과 서방이 전차 지원 결정에 이어 전투기와 장거리 미사일 공급 논의까지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지금과는 차원이 다른 전쟁으로 확대되는 계기를 제공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의 손실을 수용하면서 휴전을 모색해야 할지, 아니면 국제적 전쟁으로의 확전 위험성을 감수하면서 러시아를 압박할지 기로에서 미국의 고민도 깊어가고 있는 모습이다.

전쟁이 국제전으로 비화하면 세계 안보 전체가 위협받을 수 있다. 국제질서 전환기에는 교정과 징벌도 외교적 수단의 범위 안에서 모색하는 게 현실적이다. 확전 위험 못지않게 이런 불안정성을 틈타 다른 지역에서 분쟁이 발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북한의 최근 행보와 한반도 위기 고조, 대만해협 분쟁 가능성, 중동에서의 이란·이스라엘 대립 구도 재연 등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지정학의 시대에 전쟁의 위험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지만 그럴수록 국제사회는 외교적 노력을 총동원해 공존과 공영의 묘수를 찾아가야 한다. 세계는 지금 그 갈림길 앞에 서 있다.

신범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국제문제연구소 복합안보센터장과 아시아연구소 부소장, 외교부·국방부 자문위원을 맡고 있으며 『유라시아의 도전과 국제관계』 등 저서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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