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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우크라 전쟁 1년, 국제정치 구도 격변] 미국 vs 중·러 갈등 고조, 한반도에 불똥 우려…굳건한 한·미동맹 바탕으로 정교한 외교 필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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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5호 09면

SPECIAL REPORT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30일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을 접견하고 있다. [뉴스1]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30일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을 접견하고 있다. [뉴스1]

우크라이나 전쟁 1년. 이 참혹한 전쟁이 한반도에 미칠 영향은 무엇이고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우선 지난 1년간 변모된 세계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바꿔 놓은 국제정치의 현실은 기능이 마비된 유엔에서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러시아와 중국이 연대를 강화하면서 유엔은 진영 싸움의 무대로 전락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물론 인권이사회와 경제사회이사회도 마비됐다. 전쟁터에서의 인권 유린은 다뤄볼 엄두조차 못 내고 있다. 에너지와 곡물 가격이 급등해도 국제적 협력 방안은 좀처럼 마련되지 못하고 있다. 더욱 우려스러운 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핵무기 사용 가능성까지 시사하면서 ‘핵전쟁’이란 단어가 국제사회에서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처럼 급변하는 국제사회의 흐름은 한반도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칠 조짐이다. 만약 전쟁이 장기화되고 러시아와 중국의 연대가 심화되면, 미·중 갈등의 수위도 한층 높아질 것이다. 그 와중에 대만에서 무력 분쟁이라도 발생할 경우 한반도에도 불똥이 튈 수밖에 없다. 북한이 푸틴의 핵 사용 발언에 기대어 더욱 대담하게 대남 핵 협박에 나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러시아가 자포리자 원전을 공격해 심각한 안전 문제를 야기한다면 이를 북한이 모방할 우려도 상존한다. 미국 정부가 “북한 미사일이 러시아로 흘러가 전쟁에 사용되고 있다”고 경고한 건 이 같은 국제정치 구도 속에서 미국의 대북 강경책이 당분간 지속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경제도 문제다. 통상·무역 국가인 한국은 전쟁 여파로 세계 경제가 침체기에 들어설 경우 그 어느 나라보다 부정적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국제사회의 진영 대결이 가속화하는 가운데 미국 등 서방과 보조를 맞추며 대중 교역과 투자를 줄여나갈 경우 당장 우리 경제가 힘들어지는 것 또한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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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무엇보다 이 어려운 시기를 전쟁 없이 잘 견뎌내는 게 최우선 과제다. 특히 국방력을 꾸준히 강화해 나가는 게 중요하다. 첨단 기술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를 통해 북한 핵무기는 물론 중국의 잠재적 위협에도 대비해야 한다. 하지만 국방력 못지않게 중요한 건 전쟁을 각오하는 평화 수호의 의지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지도자와 국민의 결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한 달을 버티지 못할 것이라던 우크라이나는 이젠 막강한 러시아군을 잇따라 격퇴시키며 빼앗긴 영토를 하나씩 탈환하고 있다. 조국을 사수하겠다는 우크라이나 군인들의 사기 또한 충천한 상태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자유 진영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지난해 말 미 의회 연설은 2차 세계대전 때 처칠의 연설을 연상케 한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국민 모두의 힘으로 조국을 지킨다는 의지가 가시적인 결과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정부가 전쟁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만에 하나 전쟁이 발발할 경우 주저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게 자유를 지키는 길이자 인간적 존엄을 유지하는 길이다. 평화를 담보하는 데는 평화의 소중함을 알고 이를 확고히 지켜내려는 국민적 결의와 합의가 필수조건이다.

그렇다고 국방력 강화만이 답이 될 수는 없다. 복잡한 지역 정세 속에서 우리 국익을 지켜낼 수 있는 보다 ‘정교한’ 외교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다. 무엇보다 굳건한 한·미동맹이 중심이 돼야 한다. 만약 우크라이나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일원이었다면 러시아가 전쟁을 시작할 수 있었겠는가. 일각에선 나토식 핵공유 주장도 제기되지만 현실화 가능성은 크지 않다. 독일 총리가 누를 수 있는 핵단추는 존재하지 않는다. 비핵 국가와는 핵무기를 공유하지 않는다는 미국의 확고한 방침 때문이다. 이처럼 냉정한 국제 현실을 감안할 경우 한·미동맹에 기반해 미국의 핵우산을 확고히 유지하는 게 최선의 방책이다.

주목할 점은 한·미동맹을 강조하는 게 미국의 세계 전략에 무작정 따라만 가는 걸 의미하진 않는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경우에서 보듯이 자유 진영의 변방 국가가 미국의 공세적 안보 정책에만 기댈 경우 무력 분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커진다. 자칫 대리전을 치러야 할 상황에 놓일 수도 있다. 특히 한반도는 세계 그 어느 곳보다 인구와 군사적 밀도가 높은 지역이다. 한반도의 전쟁은 피해 규모나 후폭풍 측면에서 우크라이나 전쟁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비극적인 재앙을 초래할 공산이 크다.

더욱이 한국은 일본보다 더 북쪽에 위치해 있고 북한과도 직접 대치하고 있는 만큼 보다 유연한 외교 전략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냉전 시기 핀란드가 그러했다. 국경을 맞댄 옛 소련에 유화적 외교 정책을 펴는 데 대해 일부 서방국가들 사이에선 ‘핀란드화(Finlandization)’를 조롱하는 목소리도 적잖았지만 결국엔 옛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하지 않고 전쟁 없이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굳건한 한·미동맹을 유지하는 가운데 이 같은 지정학적 특수성을 지속적으로 알리면 미국도 한국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게 될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주는 또 다른 교훈은 지난 100년 우크라이나 질곡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우크라이나는 1922년 소련연방의 공화국이 됐다. 이때 러시아와 가까운 동쪽 지역 주민들이 공산당을 등에 업고 전면에 나섰다. 1941년 나치 독일이 진격해 오자 이번엔 서쪽 주민들이 나치에 동조하며 완장을 찼다. 푸틴이 이번 전쟁의 명분으로 ‘탈나치화’를 내세운 배경이다. 이런 역사 속에서 우크라이나 국민은 동서로 갈라져 서로를 배척하며 돌이키기 힘든 상처를 주고받았다. 국제사회에서는 이 같은 오랜 내부 분열이 푸틴의 전쟁 도발을 부추긴 또 하나의 요인이 됐을 것이란 분석도 적잖다.

최근 북한의 잇단 도발에 맞서 우리 정부도 단호한 대응에 나서고 있다. 확고한 결전 의지를 표명함으로써 북한의 무력 도발 의지를 꺾겠다는 메시지다. 잊지 말아야 할 건 전쟁보다 더 중요한 게 평화라는 사실이다. 역사적으로도 상대방 의도를 잘못 해석하거나 서로의 대응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전혀 뜻하지 않게, 우발적으로 전쟁이 시작되는 경우가 많았다. 지난 1년간 우크라이나 국민이 겪어야 했던 참혹한 고통은 어떻게든 전쟁은 막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재확인시켜주고 있다. 국민적 단합을 공고히 하는 가운데 국익을 최우선시하는 외교 전략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구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조현 전 주유엔대사. 연세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컬럼비아대에서 석사, 프랑스 툴루즈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에너지자원대사·주오스트리아대사·주인도대사·주유엔대사와 외교부 1·2차관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서울대 객원교수를 맡고 있다. 『한국 대사의 인도 리포트』 등의 저서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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