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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여배우 “미스터 김과 춤추러 왔다” 송별파티 참석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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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5호 26면

[김동호 남기고 싶은 이야기] 타이거 사람들 〈26·끝〉 부산영화제 화려한 퇴장  

2010년 10월 8일 개막식 다음날 개최된 영화배우들 파티에서 여배우들에게 환송받고 있는 필자. [사진 김동호]

2010년 10월 8일 개막식 다음날 개최된 영화배우들 파티에서 여배우들에게 환송받고 있는 필자. [사진 김동호]

2010년 10월 7일 제15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피아니스트 노영심이 무대에 올라 그해를 마지막으로 퇴임하는 나를 위해 직접 작사·작곡한 ‘당신의 이 순간이 오직 사랑이기를’을 연주했다. 이에 맞춰 무대에선 가수 윤건이, 영상으론 배우 엄정화·문소리·예지원·김남길·황정민이 함께 노래했다. 애조 띤 이 노래는 개막식장을 메운 6000여 관중의 심금을 울렸다.

대형화면엔 지난 15년간의 내 활동 모습이 소개됐고, 이어 상영된 애니메이션 트레일러(연상호 감독 제작)에는 택배 오토바이 뒷좌석에 앉아 남포동에서 해운대를 거쳐 개막식장에 도착하는 내 모습이 담겼다. 다음으로 중국 장이머우(張藝謨) 감독의 개막영화 ‘신사나무 아래에서’의 상영이 이어졌다.

대만이 주최한 대만파티에선 시작과 함께 불이 꺼지며 부산을 찾았던 대만 감독들의 나에 대한 헌사(獻辭)가 영상으로 소개됐다. 불이 켜지자 ‘음식남녀’(1994) ‘애정만세’(1994) 등에서 열연한 대만 여배우 양구이메이(楊貴媚)가 한복을 입고 우리말로 ‘사랑해 당신을’ 부르며 무대에 올랐으며, 나를 불러 함께 춤도 췄다. 대만 뉴웨이브의 대표 감독인 허우샤오셴(候孝賢)·차이밍량(蔡明亮)은 대만정부의 감사패를 전달했다. 제니퍼 자오(饒紫娟) 타이베이(臺北) 영상위원회 위원장이 연출한 깜짝 이벤트는 내 눈시울을 젖게 했다.

‘영화의 전당’ 준공 1년 앞두고 물러나

와이드앵글 파티에서 프랑스 배우 쥘리에트 비노슈와 함께 춤추고 있는 필자. [사진 김동호]

와이드앵글 파티에서 프랑스 배우 쥘리에트 비노슈와 함께 춤추고 있는 필자. [사진 김동호]

독립영화인들이 밤새워 즐기는 ‘와이드앵글 파티’에선 젊은 영화인들이 나를 무등 태워 장내를 돌았다. 파티장에 온 프랑스 여배우 쥘리에트 비노슈는 마이크를 잡고 “나는 배우로 이곳에 온 게 아니라 미스터 김과 춤을 추려고 왔다”며 한 시간 이상 나와 춤을 췄다. 티에리 프레모 칸영화제 집행위원장, 베로니크 칼레 프랑스 국립영화원(CNC) 회장 등이 함께 어울렸다. ‘퐁네프의 여인들’ ‘프라하의 봄’으로 친숙한 비노슈는 폴란드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블루’(93)로 베니스영화제에서, 영국 앤서니 밍겔라 감독의 ‘잉글리쉬 페이션트’(97)로 베를린영화제에서, 이란 아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증명서’(2009)로 칸영화제에서 각각 여우주연상을 받은 세계적인 연기자다. 그런 비노슈가 내 퇴임에 맞춰 부산을 찾아 함께 춤춘 것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다음날 밤에는 티에리 프레모 칸영화제 집행위원장, 허우샤오셴 대만 감독, 사이먼 필드 전 로테르담영화제 집행위원장, 피터 반뷰런 네덜란드 언론인, 논지 니미 부트르 태국감독 등 타이거클럽 회원들이 모여 밤새 송별파티가 열렸다. 더없이 감동적이고 화려한 퇴장이었다.

퇴임하면서 『영화, 영화인 그리고 영화제』(문학동네)와 영문판 『MR. KIM Goes to Festival』 등 두 권의 책을 펴냈고, 해외에서 찍은 사진으로 ‘열정’ 사진전도 열었다. 2005년 제10회 영화제를 끝으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심혈을 기울여온 ‘영화의 전당’ 건립이 한창 진행 중이어서 미뤘다.

영화의 전당 전경. [사진 김동호]

영화의 전당 전경. [사진 김동호]

영화제 초창기엔 극장을 대관하려면 ‘추석 대목’을 피해 명절 직전에 영화제를 마치거나 추석 3주 뒤에 시작하도록 일정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개최 일자가 9~11월로 매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전용상영관 건립을 위한 여론조성과 예산확보에 나섰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2002년 11월 한나라당 이회창, 민주당 노무현, 국민통합21 정몽준, 민노당 권영길 등 4당 후보로부터 ‘부산영화제 전용관 건립’을 대선공약으로 채택하도록 교섭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하자 대선공약을 근거로 기획예산처에 건립비 100억원을 요구했지만 반영되지 못했다.

2003년 9월 5일 부산을 방문한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에게 건의해 40억원을 국회 예결위에서 반영하기로 약속받았고, 7일 부산에 온 노무현 대통령에게 건의해 2004년 예산에 40억원의 용역 및 설계비가 책정돼 정부 및 지방비를 합쳐 460억원이 들어갈 전용관 건립에 착수할 수 있었다.

나는 전용관인 ‘영화의 전당’을 호주의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나 스페인의 빌바오 구겐하임미술관처럼 도시의 랜드마크로 조성하고 싶었다. 설계자 선정을 앞두고 해외 중진 건축가 일곱 명을 대상으로 하는 ‘지명 경쟁 입찰’ 방식을 관철했고, 최종적으로 오스트리아 건축가 쿱 힘멜브라우가 선정됐다. 건축비가 1200억원으로 늘어난 상황에서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예비타당성 검토를 거쳐 국비 약 700억원의 지원이 결정됐는데, 허남식 부산시장이 나머지 예산을 시에서 부담하는 결단을 내리면서 2008년 10월 2일 기공식을 열 수 있었다. 예산확보에 3년이 걸리면서 최종적으로 1720억원이 들어갔다. 예산 확보과정에서 당시 문화부 박양우 기획관리실장, 기획예산처 장병완 차관, 신철식 정책홍보관리실실장, 김대식 국장, 예비타당성 검토를 맡았던 KDI의 현오석 원장 등 많은 분의 도움을 받았다. 나는 ‘영화의 전당’은 후임 집행위원장이 운영해야 한다고 판단해 준공 1년을 앞두고 물러났으며, 개관은 2011년 10월 이뤄졌다.

폐막식 후 퇴임 파티에 참석한 영화제 스태프들. 뒷줄 왼쪽부터 오석건 전 사무국장, 김지석 프로그래머, 안병율 부위원장, 이용관 공동위원장, 전양준 프로그래머, 배우 안성기. [사진 김동호]

폐막식 후 퇴임 파티에 참석한 영화제 스태프들. 뒷줄 왼쪽부터 오석건 전 사무국장, 김지석 프로그래머, 안병율 부위원장, 이용관 공동위원장, 전양준 프로그래머, 배우 안성기. [사진 김동호]

부산영화제 15년은 인생의 전성기였다. 최선을 다했고, 모든 열정을 쏟았으며, 많은 일화도 남겼다. 제1회 영화제 행사가 끝나고 자정에 숙소였던 부산호텔을 나오니 음식점들이 모두 문을 닫아 ‘뒤풀이’ 장소가 없었다. 그래서 호텔 앞 거리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외국 손님들과 술자리를 마련하고 밤새 어울렸다. 음식과 술은 근처 포장마차에서 구했다. 이렇게 시작된 ‘스트리트 파티’는 2, 3회를 거치면서 부산영화제의 ‘명물’이 됐다. 많은 영화사가 돗자리를 깔고 이를 따라 했다.

1998년(제3회) 9월 28일 오후 9시엔 남포동 극장에서 중국 자장커(賈樟柯) 감독의 ‘소무’가 상영됐고, 이어 10시에는 자동차로 1시간 이상 떨어진 해운대 파라다이스호텔에서 ‘프랑스의 밤’ 행사가 열렸다. 남포동에선 자장커를, 해운대에선 주한프랑스대사를 비롯한 프랑스대표단을 소개해야 했지만, 정상적인 교통수단으론 시간을 맞출 수 없었다.

고심 끝에 택배회사에 전화해 짐 대신 나를 오토바이 뒤에 태워 ‘배달’해 달라고 부탁했다. 넥타이 정장에 헬멧을 쓰고 택배 오토바이 뒤에 앉아 위험을 무릅쓰고 달린 끝에 두 행사에 모두 맞출 수 있었다. 영화제 주 무대가 해운대로 옮긴 3년 뒤까지 이렇게 택배 오토바이를 자주 이용했다.

초창기 조선비치에서 미포에 이르는 해운대 해변 여기저기 늘어선 포장마차는 국내외 영화인들이 삼삼오오 둘러앉아 밤을 지새우며 담소하는 명소가 됐다. 나는 매일 영화제 일정이 끝나면 하루도 빠짐없이 자정부터 새벽 3시까지 모든 포장마차를 돌며 국내외 손님들과 소주를 한 잔씩 주고받으며 환담했다. 매일 소주 100~150잔을 마신 셈이다. 퇴임했을 때 일부 언론에서 ‘술로 영화제를 성공시켰다’ ‘술로 세계영화계를 제패했다’라는 기사가 나왔을 정도였다.

홍콩의 왕자웨이(王家衛) 감독과 일본의 기타노 다케시(北村武) 감독은 “평소라면 일 년간 마실 술을 하룻밤에 김 위원장과 함께 마셨다”고 각각 회고했다. 이처럼 몸을 사리지 않고 뛰었던 15년이었다. 국내외 언론과 영화계의 조명을 받으며 화려하게 퇴임할 수 있었던 것은 영화제가 급속하게 성장하는 정점에서 스스로 물러났기 때문이었다고 믿는다.

행사 때 택배 오토바이 타고 신속이동

부산국제영화제가 짧은 기간에 아시아 정상의, 세계적 영화제로 급성장한 건 무엇보다 ‘아시아의 신인 감독을 발굴하고 그들의 영화제작을 지원한다’는 일관된 목표와 이를 뒷받침한 프로젝트가 적중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위해 첫째,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신인 감독의 영화를 소개하고 시상하는 ‘뉴 커런츠’ 부문을 운영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제1회)의 홍상수, ‘초록물고기’(제2회)의 이창동, ‘소무’(제3회)의 중국 자장커 등 역량 있는 아시아 감독들의 첫 영화를 소개한 뒤 세계로 진출시키는 창구 역할을 했다.

둘째, 좋은 기획은 있으나 자금이 없어 영화를 만들지 못하는 아시아 감독들을 위해 부산프로모션플랜(PPP)을 운영했다. 감독·제작자가 기획안을 제출해 선정되면 부산에서 투자자를 중계하는 프로젝트마켓이다. 뒤에 아시아프로젝트마켓(APM)으로 이름을 바꿨다. 1997년 국제회의를 거쳐 제3회 영화제부터 시행했는데 첫해에 선정된 이란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순환’은 부산에서 투자자를 만나 작품을 완성한 뒤 베니스에서 대상을 받았다. 이듬해 선정된 중국 왕샤오슈아이(王小帥) 감독의 ‘북경자전거’가 베를린에서 감독상을 수상하면서 아시아 감독들이 앞다퉈 참여하는 행사가 됐다.

2005년(제10회)엔 ‘아시아영화아카데미’를 창설하고 ‘아시아필름펀드’를 조성해 제작을 사전 지원하면서 부산국제영화제는 아시아 대표 영화제로 도약할 수 있었다. 오늘날 한국영화가 칸·베를린·베니스 등 세계영화제로 진출해 잇달아 수상하고 전 세계에서 주목받고 각광받는 기틀도 부산영화제에서 마련됐다고 확신한다.

함께 창설하고 15년간 열정을 바친 고 김지석(2016년 칸에서 별세), 이용관·전양준과 혜안으로 좋은 영화와 프로젝트를 선정한 역대 프로그래머들, 헌신적으로 일한 오석근을 비롯한 스태프들과 자원봉사자들, 무엇보다도 영화제를 성원하고 참여한 모든 분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연재를 마치면서 중앙SUNDAY 독자 여러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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