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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제럴드, 파리서 헤밍웨이와 샴페인 마시며 우정 쌓아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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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5호 25면

손관승의 와글와글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 스콧 피츠제럴드. [사진 위키피디아]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 스콧 피츠제럴드. [사진 위키피디아]

올 초부터 두 달 동안 제주도에서 고립을 자처하고 있는 내 일상은 단순하여 BMW 세 가지로 요약된다. 그것은 독일의 명품 자동차도 아니고, 버스-지하철-걷기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B는 책(Book), 한 권의 책을 쓰기로 했다. M은 식사(Meal)의 독립, 평생 요리와 담 쌓고 살던 남자의 ‘생존 요리’이다. W는 걷기(Walk), 온통 걷고 싶은 곳들이니 자주 걷는다. 일(책 쓰기), 요리(식사), 건강(걷기)은 자유의 3요소이며 나이 들수록 더 중요해지는 것들이니까.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20년대에도 파리에서 BMW 일상을 보낸 한 명의 미국인이 있었다.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 F. 스콧 피츠제럴드가 그 주인공이다. 1차대전이 끝난 직후 일련의 미국 작가와 예술가들이 대거 파리로 몰려온다. 우디 앨런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도 잘 그려져 있다. 왜 파리인가? 1차대전을 통해 유럽, 특히 파리의 문화적 힘과 아름다움에 눈을 떴고, 미국과 프랑스의 환율 차이가 극심해 미국 작가들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게다가 미국은 이 시기에 강력한 금주법을 시행하고 있어 술을 좋아하는 작가들은 대서양을 건넜다. 이 시기 미국을 떠난 자발적인 파리 망명객 가운데는 피츠제럴드와 함께 어네스트 헤밍웨이, 거트루드 스타인 같은 작가들도 있었다.

파리 시절 피츠제럴드의 삶 역시 BMW로 요약할 수 있다. 작가이니만큼 책(B), 주로 영어권 작가와 어울렸던 잦은 식사(M) 모임. 다만 W는 걷기가 아니라 와인을 의미한다. 미국에 있는 그의 묘석에는 추모객들이 올려놓은 중절모, 연필, 동전, 다양한 술병 등을 볼 수 있는데 생전의 그를 상징하는 것들이다. 그중 가장 많은 것은 와인 코르크인데 생전에 그가 와인과 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특히 좋아했던 것은 샴페인, 이런 말을 남겼을 정도다. “뭐든 지나친 것은 나쁘지만 샴페인은 괜찮다.”

피츠제럴드는 1924년 부인 젤다와 함께 유럽으로 건너온 뒤 프랑스 남쪽과 이탈리아를 오가며 생활하다 대표작 ‘위대한 개츠비’를 출간한다. 이 책으로 그는 재즈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라는 명성을 얻게 된다. 1920년대는 서방세계에 재즈가 번창하던 시대였고, 파리에는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미국을 떠나온 흑인 재즈 연주자들이 몰려들었다. 당시 파리에서는 흑인이 연주하는 음악만 전통 재즈로 인정하던 분위기였는데, 파리를 찾아온 흑인 연주자 가운데는 마일스 데이비스, 덱스터 고든, 버드 파웰 같은 저명한 이름이 있다.

그 시절 피츠제럴드는 헤밍웨이와 우정을 맺게 된다. 미술사에서 빈센트 반 고흐와 폴 고갱의 만남만큼 화제가 되었던 작가들의 우정이다. 헤밍웨이의 증언에 따르면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1925년 파리의 술집 ‘딩고 바’, 아직 무명이었던 헤밍웨이에게 피츠제럴드는 자신을 소개했으며 그날 주문한 것도 샴페인이었다고 한다.

피츠제럴드의 묘석에 놓인 추모의 물건들. 와인코르크가 많이 보인다. [사진 위키피디아]

피츠제럴드의 묘석에 놓인 추모의 물건들. 와인코르크가 많이 보인다. [사진 위키피디아]

첫 만남 직후 피츠제럴드는 헤밍웨이에게 자동차를 찾으러 리옹에 함께 가자고 제안했지만, 막상 기차가 출발할 때까지 차 주인은 도착하지 않았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은 호텔 식당에서 달팽이 요리를 앞에 놓고 플뢰리(Fleurie) 와인을 마시는데, 보졸레 지방의 꽃이라는 별명을 얻은 와인이다. 하지만 막상 르노 자동차에는 지붕이 없어 파리로 오는 동안 여러 차례 소나기를 만나는 바람에 중간중간 주차해놓고 쉬면서 한잔했다고 한다.

파리로 돌아온 며칠 뒤 피츠제럴드는 헤밍웨이에게 선물로 자신의 신간 소설 한 권을 내미는데 그 책이 바로 ‘위대한 개츠비’였다. 피츠제럴드는 술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헤밍웨이와 달리 술이 강하지는 않아서 종종 주사를 부리곤 했다. 그러나 술을 마시지 않을 때는 참으로 좋은 친구였다고 헤밍웨이는 회고했다. 피츠제럴드는 헤밍웨이 재능을 한눈에 알아보고 자신의 책을 낸 스크리브너스 출판사의 담당 편집자 맥스 퍼킨스에게 그를 추천한다. 헤밍웨이 최초의 출세작 ‘태양은 다시 뜬다’는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피츠제럴드의 대표작 ‘위대한 개츠비’는 세 차례나 영화로 만들어졌고 로버트 레드포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등 당대 최고의 스타가 주인공으로 나올 정도로 화제가 됐지만, 소설의 원작은 영화와 조금 다르다. 20세기 출간된 미국 소설로는 단연 첫 번째 손가락에 꼽힐 정도다. 그가 소설의 공간으로 택한 곳은 뉴욕 옆의 길게 뻗은 섬 롱 아일랜드, 웨스트에그와 이스트에그라는 가상의 공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다. 첫사랑 데이지를 되찾기 위해 밤마다 파티를 열던 곳이다. 이 소설에는 주인공이 밀주로 거부가 됐다는 설정부터 술과 관련된 모티브가 많다. “개츠비의 푸른 정원에서는 남자들과 여자들이 속삭임을 주고받으며 샴페인을 사이에 두고 별빛 아래서 부나비처럼 오갔다.”

주인공 제이 개츠비와 젊었을 때 사랑했던 여인 데이지 뷰캐넌은 작가의 아내 젤더 세이어를 연상시킨다. 물질적 성공에 큰 기대를 갖고 있다가 실망과 좌절한 스토리까지 비슷하다. 샴페인을 좋아했던 젤더는 위궤양에 시달렸다. 이 소설은 전쟁이 끝난 직후 방향 감각을 잃은 채 방황하던 시대적 분위기와 도덕적 혼란을 잘 보여준다. 소설 초반에는 화자가 사촌인 데이지 부부와 함께 클라레(Claret)를 마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클라레는 보르도 와인을 의미한다. 데이지가 19세때 소테른의 귀부 와인을 마시고 취했다는 표현, 그리고 주인공 개츠비가 벽장에서 꺼내온 ‘샤르트뢰즈’라는 술을 함께 마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프랑스의 수도원에서 시작된 포도주로 만든 리큐르다. 모두 작가의 와인 실력이 녹아든 표현이다. 너무도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였던 피츠제럴드였지만, 알콜 중독으로 또 생활고에 시달리느라 44살의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떴다.

손관승 인문여행작가 ceonomad@gmail.com MBC 베를린특파원과 iMBC 대표이사를 지냈으며, 『리더를  위한 하멜 오디세이아』, 『괴테와 함께한 이탈리아 여행』 등 여러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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