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300만명 넘게 본 ‘영웅’, 영화도 민심을 천심으로 여길 때 성공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825호 24면

오동진의 시네마 역사

안중근과 유관순처럼 구한말의 인물을 다룬 영화는 의외로 많지 않다. 비교적 쉽게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바, 승리와 성취의 역사가 아니라 좌절과 어둠의 시대 속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더 휴먼 스토리는 강해지지만 한편으로는 패배의 역사를 다시 깨우치게 한다는 점에서 불편한 감도 없지 않다. 할리우드스타일의 해피엔딩에 익숙한 젊은 관객들이 근대사를 다룬 영화들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기도 하다.

윤제균 감독의 최근작 ‘영웅’이 당초 100만을 넘기지 못할 거라는 우려가 높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1월 31일 현재 전국 307만 명의 관객을 기록하고 있다. 영화 흥행을 산업적으로 분석하면 여러 이유가 나올 수 있다. ‘아바타’의 쓰나미 흥행과 OTT의 발흥으로 극장 문화에 일대 변화가 일어난 상황이라 초반 흥행이 발목잡히는 듯했지만 ‘유령’ ‘교섭’ 등 한국형 블록버스터로 불리는 후속작들이 그다지 높은 점수를 받지 못한 점이 대체재를 필요로 했을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더 퍼스트 슬램 덩크’나 ‘오세이사(오늘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의 이상 열기에도 불구하고 ‘영웅’이 끈덕지게 300만을 넘긴 것은 역사의 진심, 안중근의 ‘그 우국충정의 마음’이 올바로 읽혔기 때문으로 보는 게 맞다. 게다가 ‘영웅’은 뮤지컬 영화였다.

암살 순간, 노래로 치장할 수는 없어

생각과는 달리 ‘영웅’의 하이라이트 장면은 안중근이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는’ 장면이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그건 극영화에서나 그럴 수 있다. 다이얼로그 대신 솔로곡과 코러스로 점철되는 뮤지컬 장르 영화에서 암살 순간을 노래로 치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뮤지컬 영화는 몹 씬(mob scene)의 코러스가 더 중요하다. 톰 후퍼가 만든 2012년작 ‘레 미제라블’에서 마지막 바리케이드 코러스 장면에서 한국 관객들은 펑펑 울었다. ‘레 미제라블’은 그 단 한 장면으로 전국 500만 관객을 넘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웅’에서도 안중근이 블라디보스톡에서 하얼빈으로 향하는 일종의 출정식 장면 코러스와 극 후반의 법정 씬 코러스가 하이라이트 중의 하이라이트로 꼽힌다. 안중근의 의거를 민중의 의지가, 하늘같은 민심이 떠받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역시 영화도 민심을 천심으로 여길 때 성공하는 법이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와 그의 수행들에게 7발의 총을 쏜 때의 정확한 연대를 모르고, 막연히 그 시기가 한일합방 이후라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나라를 잃고 비분강개한 우국지사의 심정이 작용했을 것이라 판단하기 때문이다. 한일합방은 순조 4년인 1910년에 자행된다. 그러나 나라를 잃는다는 것, 국권을 뺏긴다는 그 조짐은 짧게는 10년 길게는 약 20~30년 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한결같은 분석이다.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는 1910년 이후가 아니라 그 직전인 1909년 10월26일의 일이었다. 예민한 구한말의 지식인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가 살아 있는 한 동아시아의 평화를 이룰 수 없고 조선의 강탈을 막을 수 없다고 예견한 것이다. 그(정성화)가 거사 동지인 우덕순(조재윤), 조도선(배정남), 유병하(이현우) 등과 히로부미 사살을 모의하는 과정은 김훈의 역작 『하얼빈』에도 잘 묘사돼 있다.

기자 출신의 소설가 김훈의 문체는 헤밍웨이의 그것처럼 매우 간결한 건조체로 유명한 바, 소설에서는 안중근의 심리 묘사가 일체 그려지지 않은 채 행적의 팩트만이 추적되고 있다. 이 소설이 안중근의 위대함을 더욱더 필적해 냈다고 평가받는 것은 그 같은 극사실주의적 접근이야말로 안중근의 내면세계에 대한 독자들의 상상력을 오히려 더욱 더 자극해 냈기 때문이다. 아무리 용감했다 한들 안중근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중도에 포기하고, 도망가고 싶었을까. 아무리 동지들이 옆에 있었다 한들 혼자서 얼마나 고독했을까. 김훈의 소설은 그 얘기를 전혀 하지 않고 여백을 휑하니 남김으로써 오히려 역설적으로 그 내면의 고백을 철철 쏟아 내고 있는 작품이다. 윤제균의 영화는 바로 그 같은 빈 공간에 안중근과 동지들의 풍부한 감성을 불어 넣었고 그것이 영화적 성공으로 이어진 셈이 됐다.

격랑의 역사 일단 외워야 ‘영웅’ 이해

‘영웅’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1882년 임오군란부터 1905년 을사늑약를 중심으로 하는 구한말 역사를 파악하는 게 필요하다. 이럴 때는 고등학교 때 역사 선생님들이 했던 말을 떠올리면 된다. 역사 공부에는 별다른 답이 없다. 일단 무조건 외워야 한다.

강화도 조약(1876년) - 임오군란(1882) - 갑신정변(1884)-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1894)- 을미사변, 민비 시해(1895)- 아관파천(1897)- 러일전쟁(1904)- 을사보호조약, 일본의 조선 외교권 박탈(1905)- 헤이그 특사 사건, 고종 폐위(1907)-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암살(1909)- 한일합방(1910)

이 모든 일이 조선 개항 이후 34년 동안 벌어진 일로 일제 강점기 36년과 거의 같은 기간에 해당한다. 역사의 참극은 그 비극이 무르익는 과정이 반드시 존재하며 따라서 역사적 추(追)체험을 강화하면 다가올 역사의 참화를 막을 수 있다. 역사 영화가 늘 과거를 통해 미래를 상상하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와 같은 대체소설, 그것을 영화화 한 장동건 주연의 ‘2009 로스트 메모리즈’가 보여 준 주제의식이기도 하다.

일본에 나라를 뺏기기 전, 모든 불운의 배경에는 민비와 민씨 일가의 전횡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외면하기 어렵다. 1882년 임오군란이 1876년 강제 개항 이후 불안정한 세태로 인해 미곡 가격이 불안정해지고 쌀값이 폭등하자 당연히 군량미 문제가 터지면서 발생한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임금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과 그의 며느리인 민비는 이에 아랑곳없이 궁중 권력 싸움에 몰두했고 상대를 없애기 위해 외세를 이용했다. 특히 민비는 대원군이 반란군의 편에 서서 민비를 압박하자 청나라 군대로 하여금 그를 납치하게 했고, 1894년에는 동학농민군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고종을 회유해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이기까지 한다. 일본은 이를 텐진조약 위반이라며 조선 땅에서 청일전쟁을 일으킨다. 이 과정은 2019년 방영됐던 SBS 드라마 ‘녹두꽃’에서 잘 그려졌다.

민비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엇갈린다. 일본의 낭인 잡배들에게 살해당함으로써 급격한 민족적 분노의 화신이 된 민비는 오랜 세월 역사적 애증의 대상이 돼 왔으며 숱한 영화와 드라마에서 구한말 구국의 국모로 상징화 됐다. 조승우·수애 주연의 2009년작 ‘불꽃처럼 나비처럼’이 대표적이다. 민비와 그녀의 호위무사 간 사랑 이야기로 풀어졌는데 이건 윤색의 윤리학을 한참 벗어난 얘기여서 이제는 정사의 영화로선 거론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같은 소재로 그려 낸 조수미의 뮤직비디오 ‘나 가거든’이 아직까지 애청되는 노래지만, 이 역시 민비에 대한 환상과 잘못된 역사의식을 갖게 해준다는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영화 ‘영웅’에서도 일본군을 감시하는 독립군쪽 스파이 설매(김고은)의 행동 동기는 민비 살해에 대한 복수로 설정돼 있다.

이처럼 늘 역사의 ‘주역 격’이었던 민비에 비해 고종을 그려낸 인물사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특히 영화에서 고종은 항상 조연급 혹은 단역급이다. 장윤현 감독의 2012년작 ‘가비’는 그에 비해 고종을 꽤나 중심인물로 끌어 올린 작품이다. ‘가비’는 커피의 한자어로 영화는 러시아산 커피를 내리는 조선 최초의 바리스타 여성 따냐(김소연)를 앞세우는 척 사실은 고종(박희순)의 아관파천(俄館播遷) 사건을 그렸다. 아관파천이란 러시아의 공관(공사관)으로 수도(임금의 거처)를 옮긴다는 뜻인데, 쉽게 말하면 고종이 일본을 피해 (조선 내)러시아 땅으로 도망간 사건이다. 영화 ‘가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일본의 고종에 대한 독살 음모극까지 펼쳐 낸다. 이 모든 사건의 역사적 현장은 덕수궁이다. 고종이 커피를 즐겨 마셨다는 정관헌, 덕수궁 뒤쪽 돌담길을 따라 ‘고종의 길’이라 이름붙여진 아관파천 길이 복원돼 있다.

그래픽=남미가 nam.miga@joongang.co.kr

그래픽=남미가 nam.miga@joongang.co.kr

1876년 강화도 조약에서부터 1909년 안중근 거사에 이르기까지 거쳐야 할 역사적 명멸의 순간은 엄청나게 많다. 실로 격랑의 시대였다. 뮤지컬 영화 ‘영웅’ 앞까지 수십 편의 영화와 드라마가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어떤 작품은 매우 정치(精緻)하지만 어떤 작품은 역사적 시각이 불안정하고 작품의 완성도가 떨어진다. 역사 자체가 불안했던 시기이니 만큼 해석이 다양해서 그럴 수 있다. 구한말의 역사를 다룬 영화에 후기의 주석이 필요한 이유다. 그런데 어디 구한말뿐이랴.

오동진 영화평론가 ohdjin11@naver.com 연합뉴스·YTN에서 기자 생활을 했고  이후 영화주간지 ‘FILM2.0’ 창간, ‘씨네버스’ 편집장을 역임했다.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컨텐츠필름마켓 위원장을 지냈다. 『사랑은 혁명처럼 혁명은 영화처럼』 등 평론서와  에세이 『영화, 그곳에 가고 싶다』를 썼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