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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만주군과 생사 겨룬 적 드문 김일성, 선전전엔 능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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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5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62〉

린뱌오가 직접 지휘한 슈수이허 전투 승리를 자축하는 동북자치군. 이상한 무기 두 발로 2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킨 미군의 지원을 받는 국민당 군에 대한 공포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사진 김명호]

린뱌오가 직접 지휘한 슈수이허 전투 승리를 자축하는 동북자치군. 이상한 무기 두 발로 2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킨 미군의 지원을 받는 국민당 군에 대한 공포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사진 김명호]

일본이 동북 3성(만주)을 지배했던 만주국 시절,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중공)은 동북에 기반이 약했다. 범법자나 배신자들이 동북으로 도망치면 방법이 없을 정도였다. 정보도 빈약했다. 만주국이나 만철 등 중요기관에 있는 중국인을 매수해 중요 정보를 얻는 것이 고작이었다. 성과는 신통치 않았다. 돈만 날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중공은 국민당에 비해 실속이 있었다. 동북 항일무장세력의 연합체였던 ‘동북항일연군’의 주축이 공산계열이었다. 1937년 여름, 국·공이 연합해 중·일 전쟁이 본격화되자 관동군은 ‘동북항일연군’이 산하이관(山海關)을 넘어 중국 내지로 진출(入關)할 것을 우려했다. 대규모 소탕 작전을 벌였다. 4년간 계속된 관동군의 공세로 ‘동북항일연군’은 동북에서 자취를 감췄다. 명성을 떨쳤던 지휘관들도 거의 굶어 죽거나 얼어 죽었다. 잔존세력들은 동북에서 갈 곳이 없었다. 소·만 국경을 넘었다. 소련은 조선인과 중국인으로 구성된 애물단지들을 반기지 않았지만 내치지도 않았다. 중국인 저우바오중(周保中·주보중)과 리자오린(李兆麟·이조린)이 여단장과 부여단장인 외국인 혼성여단(88교도여단)에 편입시켰다.

김, 한반도서 분탕질 후 만주 복귀 반복

1945년 11월 7일, 창춘에서 열린 소련군의 10월 혁명 승리 28주년 기념식. [사진 김명호]

1945년 11월 7일, 창춘에서 열린 소련군의 10월 혁명 승리 28주년 기념식. [사진 김명호]

‘동북항일연군’ 잔존세력 중 ‘88여단’에 자리 잡은 조선인들은 기존 조직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넓디넓은 만주 땅에서 명성만 귀에 익은 사이가 대부분이었다. 연장자들이 젊고 패기만만한 김일성을 종갓집 종손을 뽑듯이 대표자로 선출했다. 이유가 있었다. 김일성의 무장투쟁은 기존의 연장자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 만주 땅을 밟고 있으면서도 만주의 일본군이나 만주군과는 생사를 겨룬 적이 드물었다. 강 건너 한반도에 진입해 가벼운 분탕질하고 만주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선전의 중요성도 일찍 깨우쳤다. 서울(당시 경성)에서 발행하던 한 신문의 기자가 와있는 인근 마을을 습격했다. 놀란 기자의 급전으로 본사가 호외를 발행했다. 김일성의 명성이 한반도를 들썩거렸다.

1945년 8월 8일, 소련이 일본에 선전을 포고하자 ‘88여단’의 ‘동북항일연군’도 전쟁 준비를 서둘렀다. 이틀 후, 여단 야영지에서 반격 선서식을 거행했다. 저우바오중과 리자오린의 연설에 이어 김일성이 연단에 올라 기염을 토했다. “동북항일연군 전사들이 연합해 반격할 날이 도래했다. 항일전쟁 최후의 승리를 우리 손으로 탈취하자.”

동북항일연군 한국인 지휘관들이 남긴 광복기념 사진. [사진 김명호]

동북항일연군 한국인 지휘관들이 남긴 광복기념 사진. [사진 김명호]

김일성의 군더더기 없는 연설은 소련군을 감동시켰다. 극동군 총사령부 군사위원 히진 중장이 저우바오중과 김일성을 따로 불러 총사령관 바실리에프스키 원수의 지령을 직접 전달할 정도였다. 헤이룽장(黑龍江)성에서 발행한 ‘저우바오중 평전’에 실린 바실리에프스키의 명령을 소개한다. “현재 88여단에 있는 중국인, 조선인, 소련인의 개별 행동을 명한다. 소련인은 명령이 있을 때까지 현 위치를 고수해라. 조선인들은 극동제1방면군과 함께 조선으로 진군해라. 중국인들은 제2방면군과 동북의 전략 요지를 분할 점령해라.” 저우에겐 두 가지를 주지시켰다. “동북으로 돌아가는 중국인들은 소련군 점령 지역의 혁명적 질서 유지에 만전을 기해라. 군사관제의 합법적 지위를 이용해 군중을 동원하고 당 조직을 만들어라.”

8월 27일 저우바오중이 ‘88여단’ 소속 중국인 간부들을 소집했다. “환자, 임산부, 신체 허약자, 아동, 소수의 유수(留守) 인원을 제외한 모든 대원은 귀국을 준비해라.” 중공도 ‘동북위원회’를 발족시켜 소련군과 협상했다. 소련에서 돌아올 ‘동북항일연군’ 전사들과 연합해 소련군이 점령한 지역 중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에 파견할 공작조 57개를 편성하기로 합의했다. 저우는 공작대의 임무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우리는 동북으로 돌아가기 전에 국민당과의 장기적인 투쟁을 준비해야 한다. 적어도 산속에서 두 차례 정도 유격전을 치를 각오가 필요하다. 각 공작조에 편성된 대원들은 동북 도착 후 소련 군복을 착용한 채 소련 위수사령부에서 공작에 참여한다. 공작조 조장은 임무가 막중하다. 소련군 주둔지 위수사령부 부사령관도 겸직해야 한다.”

동북항일연군, 동북인민자위군으로 개명

소련군 철수 후, 선양에 입성한 두위밍. [사진 김명호]

소련군 철수 후, 선양에 입성한 두위밍. [사진 김명호]

중공 동북위원회는 ‘동북항일연군’을 ‘동북인민자위군’으로 개명했다. 저우바오중을 사령관 겸 정치위원에 임명했다. 부대의 임무도 항전(抗戰) 승리에서 ‘항전 승리의 열매 보위’로 바꿔 버렸다. 9월 5일부터 13일까지 소련이 제공한 군용기 타고 동북에 진입한 ‘동북인민자위군’ 330명은 12개 중심도시와 57개 촌락으로 흩어졌다. 12개 중심도시 책임자 중 옌지(延吉)의 강신태와 무단장(牧丹江)의 김광협, 하얼빈(哈爾賓) 공작조 조장 리자오린의 부인은 조선인이었다.

‘동북인민자위군’은 현지인들의 환영을 받았다. 건군과 당 조직도 순조로웠다. 1개월 만에 4만명으로 늘어났다. 무장은 소련군이 제공한 일본 관동군과 만주국 군대, 경찰이 사용하던 총기와 박격포로 충당했다. 국민당은 항일전쟁 기간 동북을 등한시했다. 군대를 파견해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적이 없었다. 국민당 정부와 우호조약 체결한 소련 정규군이 동북에 몰려오자 만주국 관리와 경찰 출신들은 내놓고 국민당을 지지했다.

국민당군의 동북 진출은 미국의 지원을 받았다. 미국이 제공한 최신 무기로 무장한 국민당군이 동북의 대도시를 질주했다. 소련군이 철수하자 동북이 국·공 양당의 전쟁터로 변했다. 동북 최대의 도시 선양(瀋陽)에 입성한 국민당군의 지휘관은 항일명장 두위밍(杜聿明·두율명)이었다. 첫 번째 전투가 선양 인근의 슈수이허(秀水河)에서 벌어졌다. 국민당군은 사기충천했다. 린뱌오(林彪·임표)가 슈수이허에 웅크리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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