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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월 265만원' 영유 보내는 부모, 알고보면 억울한 사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경기도 하남시에 사는 서지원(35)씨는 3년 전 아들을 출산했다. 워킹맘이라 어려움이 많았지만 아이가 3살이 되면 부담을 덜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아파트 단지에 국공립 유치원이 있어서였다. 그러나 지난해 10월 서씨의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 1400세대 단지에 있는 유치원의 방과후 과정 모집인원은 14명에 불과했고, 대기 순위는 40번대를 넘어갔다. 주변 사립 유치원도 줄줄이 탈락했다. 급하게 만 3세가 갈 수 있는 어린이집을 찾았지만 “인원이 적어 만 3세 반을 없애기로 했다”는 답을 들었다. 남은 선택지는 하나, 유치원보다 몇 배 비싼 영어유치원 뿐이었다. 서씨는 최근 원비가 월 150만원인 영어유치원에 아이를 등록했다.

경기 하남시 위례신도시에 거주하는 서지원(35)씨는 지난해 11월 유치원입학관리시스템 '처음학교로'에서 지원한 유치원 3지망에서 모두 탈락했다. 사진 서씨 제공

경기 하남시 위례신도시에 거주하는 서지원(35)씨는 지난해 11월 유치원입학관리시스템 '처음학교로'에서 지원한 유치원 3지망에서 모두 탈락했다. 사진 서씨 제공

유치원 ‘광탈’… 수백만원 드는 ‘영유’로 발길 돌려

유치원을 찾지 못해 할 수 없이 영어유치원으로 발길을 돌리는 학부모가 늘고 있다. 유치원은 점점 줄어드는데 영어유치원은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늘고 있어서다. 한국교육개발원에 따르면 서울시의 유치원은 2018년 876곳에서 지난해 788곳으로 5년새 100곳(10%) 넘게 감소했다. 반면 영어유치원이 꾸준히 늘며 유치원이 사라진 자리를 채우고 있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지난해 12월 발표한 자료를 보면 서울시 영어유치원 수는 2017년 251곳에서 2021년 311곳으로 증가했다. 60곳(23.9%)이 새로 생긴 것이다.

유치원보다 돈은 더 벌 수 있으면서 상대적으로 규제는 덜 받는다는 점이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영어유치원은 편의상 ‘유치원’으로 불리지만 실제로는 유아교육법이 아닌 학원법의 적용을 받는 ‘유아 대상 영어학원’이다. 국가관리회계시스템인 에듀파인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고 만 3~5세 공통 과정인 ‘누리과정’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 비교적 규제에서 자유로운 것이다. 정부 지원은 적지만 그만큼 학원비가 비싸다. 사교육걱정없는 세상에 따르면 영어유치원의 월평균 학원비는 112만 6000원이며, 최고 월 265만원까지 받는다. 교육부가 밝힌 사립유치원의 월 평균 학부모 부담금 약 20만원의 최소 5배, 최대 10배가 넘는 것이다. 규제는 적고 수익성은 높다 보니 유치원을 폐원하고 영어유치원으로 전환하는 사례도 생긴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유치원〈영어유치원’ 코앞에 둔 강남… 할 수 없이 ‘영유’행

특히 서울 강남은 곧 영어유치원이 유치원보다 많아지는 ‘역전 현상’이 펼쳐질 가능성이 크다. 강남구와 인근 서초ㆍ송파ㆍ강동구의 영어유치원 수는 2021년 기준 140곳으로, 144곳인 유치원 수와 별 차이가 없다. 서초구에서 5살 아들을 키우는 박모(35)씨는 “집 근처의 유치원 두 곳 중 한 곳은 지난해 폐원했고 한 곳은 너무 멀었다. 구청에선 차로 15분 거리의 어린이집을 추천했다”고 말했다. 그마저 셔틀버스가 없어 맞벌이를 하는 박씨 상황엔 맞지 않았고, 울며 겨자 먹기로 유치원 대신 월 200만원이 드는 영어유치원을 택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원치 않게 경제적 부담이 커진 학부모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서씨는 “영어유치원은 관리감독 측면에서 불안해 누리과정을 적용받는 유치원에 보내고 싶었다”며 “억지로 3배의 비용을 지불하다 보니 ‘애 하나 키우는 데 이렇게 돈이 드나?’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둘째 낳기가 겁난다”는 말도 나온다. 박씨는 “초등학교 입학 전까진 그냥 뛰어놀게 하고 싶었는데 유치원이 없어 영어유치원을 보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며 “둘째 생각도 있었는데 아이 양육에 수천만원을 쓰게 되니 생각이 싹 사라졌다”고 말했다.

정부도 문제를 알고 있다. 교육부 유아교육정책과 관계자는 “지난 2018년 국공립유치원 확충을 주요 과제로 해서 지난 5년간 4000학급 넘게 확충을 했다”며 “학급수는 늘어났지만 신도시 중심으로 인구가 계속 증가하고 적절한 자리를 찾기도 어려운 경우도 있어서 적기에 공급되지 못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때문에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선아 숙명여대 아동복지학부 교수는 “유치원 평판과 방과후 과정 등에 따라 유치원별로 수요 차이가 큰 것도 ‘유치원 대란’의 한 요인”이라며 “유보통합 논의를 통해 집 근처 모든 기관이 같은 질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송기창 숙명여대 교육학과 명예교수는 “사립유치원이 부족한 곳 위주로 국공립 유치원을 제공해주는 게 맞는 방향”이라며 “다만 학생 수 확보가 안 될 경우 예산 낭비 우려도 있으니 신중하게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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