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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는 항소 포기한 한동훈…'항명 임은정'엔 항소, 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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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최현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최현철 사회디렉터

최현철 사회디렉터

지난달 13일 춘천지검 강릉지원에서 조업 중 납북됐다 귀환 후 간첩으로 몰린 무진호 선장 고 손용구씨와 삼창호 선원 고 김달수씨에 대한 재심 선고 공판이 열렸다. 재판장 이동희 판사의 최종 판단은 ‘무죄.’ 그는 “지난 공판 때 검찰이 구형한대로” 선고한다고 밝혔다.

이 사건은 다른 과거사 사건과 달리 진실화해위에서 진실규명 결정을 거치지 않고 피고인 유족이 직접 낸 재심이어서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도 검찰은 지난해 12월 13일 무죄를 구형했다. 격세지감(隔世之感)이 느껴졌다.

기억은 딱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2012년 12월 28일 서울지법(현 서울중앙지법)에선 영화 같은 일이 벌어졌다. 북한에 동조한 혐의로 15년 형을 선고받은 윤길중 전 진보당 간사의 재심사건이었다. 주인공은 임은정 검사(현 대구지검 중요경제범죄수사부장). 그는 결심공판이 열리는 법정에 들어오면서 검사 출입문을 걸어 잠갔다. 이어 피고인에게 무죄를 구형했고 곧바로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이 발칵 뒤집어졌다.

재심 무죄구형 징계했던 검찰
최근 세월호 항소포기 등 변화
‘임은정 사건’ 불복…아직 지켜봐야

지난달 12일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와 4월16일의약속국민연대 관계자들이 서울고등법원에서 세월호 참사 국가 손해배상 청구 소송 판결에 대해 입장을 발표하는 모습. [연합뉴스]

지난달 12일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와 4월16일의약속국민연대 관계자들이 서울고등법원에서 세월호 참사 국가 손해배상 청구 소송 판결에 대해 입장을 발표하는 모습. [연합뉴스]

사실 임 검사는 이미 석 달 전 민청학련 사건 피해자 박형규 목사의 재심에서도 무죄를 구형했다. 이전까지 검찰은 시국사건 재심에서 “법과 원칙에 따라 재판부가 판단해달라”며 백지 구형을 해왔다. 그런데 임 검사가 관행을 깨고 반성까지 담아 무죄를 구형한 것이다.

여론은 환호했지만, 검찰 조직의 분위기는 달랐다. 석 달 뒤 윤길중씨 결심 공판을 앞두고 공안부에서 제동을 걸었다. 임 검사가 이의제기권을 행사하며 버티자 아예 담당 검사를 교체했다. 임 검사는 결국 ‘문 잠그고 무죄 구형’이라는 대형 사고를 쳤다.

도가니 검사로 유명해진 그의 검사 인생은 이때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정직 4개월의 중징계를 받았고, 2015년에는 적격심사에서 탈락 위기에 몰렸다. 5년에 걸친 소송 끝에 징계 취소 판결을 받았지만, 그동안 승진에서 누락되고 한직을 떠돌았다. ‘항명검사’ ‘배신자’ 같은 주홍글씨도 따라다녔다.

세월이 흐르고 정권이 바뀌어도 재심사건에 소극적인 검찰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백지 구형을 고집하고, 무죄가 나도 항소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2019년 7월 전주지법 군산지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제5공진호 사건이 대표적이다. 불과 한 달 전 문무일 당시 검찰총장이 “재심 무죄 선고 시 유죄 인정 증거를 발견하지 못하면 상소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구체적 지침을 밝혔지만, 검찰은 보란 듯 항소했다.

이런 검찰의 분위기가 확 바뀐 것은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취임하면서다. 서막은 1975년 20년 형을 확정받고 8년을 복역한 이창복씨 사건이었다. 그는 2008년 재심에서 무죄를 받은 뒤 이듬해 손해배상을 청구해 위자료 6억원, 지연손해금 4억9000만원을 받았다. 하지만 2011년 대법원이 “지연손해금을 1975년부터 계산한 것은 잘못”이라며 판례를 변경하면서 악몽 같은 ‘빚 고문’이 시작됐다. 국정원이 제기한 반환소송에서 진 뒤로 연체이자까지 더해져 토해낼 돈이 15억원으로 불었다. 그동안 법원이 연체이자를 면제해주자는 중재안을 냈지만, 국정원은 요지부동. 그런데 한 장관이 취임 한 달 만에 이를 전격 수용한 것이다.

8월에는 제주 4·3 사건 피해자에 대한 직권재심 대상을 일반재판을 받은 사람들까지로 확대했다. 그동안 개정된 특별법에 따라 군사재판에서 형을 받은 사람만 대상이었는데, 이 조치로  1500여명이 혜택을 입게 됐다. 10월엔 부산 낙동강변 살인사건 재심 무죄 피해자들에게 72억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나자 즉각 항소를 포기하고 수용했다.

그리고 이번 주, 세월호 피해자 유족에게 국가가 868억원을 배상하라는 항소심 판결에 대한 상고를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1심보다 배상액이 145억원이나 늘었지만 쿨하게 수용했다. 한 장관은 “국가 잘못이 명확히 확인된 이상 신속히 재판을 종료해 피해를 회복시키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한 장관의 거침없는 행보에 대해 평가는 엇갈린다. 검찰이 과거를 반성하고 인권을 존중하겠다는 의지는 환영할 만한 일이다. 적어도 힘과 명분을 가졌는데도 뒷짐 지고 있었던 전 정부에 비해선 진일보했다. 반면 야권 인사들을 향한 대대적인 수사를 벌이는 것에 대한 비판 여론을 물타기 한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검찰이 강릉에서 납북어부들에게 무죄 구형을 하고 1주일 뒤, 서울에서 눈길이 가는 판결이 나왔다. 임은정 검사가 검사 블랙리스트 때문에 불이익을 받았다며 낸 손해배상 소송 1심에서 1000만원의 배상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법무부는 지난달 10일 결과에 불복해 항소했다. 아직은 모든 게 혼란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