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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퇴계와 겨룬 대학자, 그를 키운 ‘아버지의 모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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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호남 유학의 큰 기둥, 기대승 집안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1534년 전라도 광주에 사는 한 남자가 백일 아기를 안고 황망해 한다. 아내가 아기를 남겨둔 채 숨을 거둔 것이다. 위로는 아직 열 살도 안 된 아이 셋이 더 있어 모두 네 명의 생존이 아버지인 그에게 달려 있다. 양반이라면 다 하는 재혼은 물론 첩도 없이 오로지 아이들의 양육에 전력을 다한 이 남자, 바로 호남 유학의 큰 기둥 기대승의 아버지 기진(奇進·1487~1555)이다. 고봉 기대승(1527~1572)은 퇴계 이황과 12년에 걸친 왕복 서신으로 사칠이기논변(四七理氣論辯)을 전개하여 조선 유학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도학이 발흥하던 16세기의 사상계가 권위주의와 형식주의로 흐를 가능성을 견제한 것으로 평가되는 기대승. 그의 배후에는 생후 3개월 된 갓난이를 성년으로 서게 한 아버지의 ‘모성(母性)’이 있었다.

아내 잃은 부친, 세 아들 30년 양육
재혼 안 하고 “너를 찾아라” 가르침

퇴계와 12년 ‘서신논쟁’ 빛난 자취
외가 여성들 지극한 사랑도 큰 힘

학문·정치·가정 모두 봄바람처럼
형식·권위 넘어선 유학의 새 얼굴

중앙 정치서 물러나 광주에 은거

조선시대 호남 유학을 일군 고봉 기대승의 위패를 모신 월봉서원 빙월당 전경. 광주광역시 광산구에 있다. [중앙포토]

조선시대 호남 유학을 일군 고봉 기대승의 위패를 모신 월봉서원 빙월당 전경. 광주광역시 광산구에 있다. [중앙포토]

경기 덕양을 본거지로 한 행주 기씨 집안의 기진이 낙남(落南)하여 광주에 터를 잡은 것은 폭력 정치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은거의 의미가 컸다. 소년등과로 청현직을 거치며 장래가 촉망되던 아우 기준(奇遵·1492~1521)이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참혹하게 죽자 형인 그는 세상을 등지는 쪽을 택한 것이다. 기진은 광주에 머물고 이복형 기원(奇遠)은 장성에 터를 잡는데, 그들이 전라도로 향한 것은 자신들을 품어줄 곳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상의 음덕이 서린 곳이라는 표현이 적절한데, 증조 기건(奇虔·1390~1460)이 세종조에 전라도 관찰사 및 전주부윤을 지낸 것이다. 당시 기건은 지역민과 애환을 함께 한 공감의 목민관이었고(세조실록 6년), 이후 호남 유생들에게 하나의 표준이 되었다. 그런 조상의 존재는 참혹한 세상에 내쳐진 후손들에게 정신적인 버팀목이 되었을 것이다.

2022년 11월 17일 고봉 타계 450주기를 기념해 열린 고유제. [사진 월봉서원]

2022년 11월 17일 고봉 타계 450주기를 기념해 열린 고유제. [사진 월봉서원]

한편 36세의 남편 기진을 따라 남하하던 온양 방씨는 청주 인근에서 숨을 거두는데, 소생은 없었다. 먼 훗날 고봉은 조정을 오르내릴 때마다 전모(前母)의 묘소에 성묘한다. 광주에 정착한 기진은 14살 아래의 진주 강씨(1501~1534)와 재혼하여 40세에 첫아들 대림(大臨)을, 41세에 둘째 대승(大升)을, 다음으로 딸을 얻었고, 쉰이 다 되어 막내 대절(大節)를 얻는다. 처가는 아내의 조부 강학손(1456~1523)이 유배를 계기로 영광에 정착한 집안이었다. 기대승은 ‘자경설(自警說)’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2년 후에 여동생이 역질에 걸려 죽은 슬픈 가족사를 기억하며, 당시 아버지는 딸을 잃은 충격에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절(寺)로 들어가 한동안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벼슬보다 인간의 가치가 중요

태극 무늬가 선명한 빙월당 정문. [중앙포토]

태극 무늬가 선명한 빙월당 정문. [중앙포토]

고봉의 형제들은 오로지 아버지의 양육과 교육에 의지하여 성장한다. 기진이 아들들에게 행한 교육은 고봉의 ‘과정기훈(過庭記訓)’에 소상한데, 공부의 목적과 방법 그리고 세상을 사는 법 등을 담고 있다. 그는 아들들이 벼슬과 녹봉을 구하는 데 진을 빼기보다 일상의 인간적 가치에 의미를 두길 바랐고, 사람들과 행동을 너무 다르게 하지 말되 마음에 부끄러움은 없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즉 나를 찾아가는 학문(爲己之學)을 주문하면서 “벼슬길의 풍파는 매우 두려운 것임”을 상기시킨다.

고봉 기대승의 문집 목판. [사진 문화재청]

고봉 기대승의 문집 목판. [사진 문화재청]

기진은 지나친 자신감에 상대를 쉽게 보는 데서 화(禍)가 초래한다고 보는데, 아우 기준이 그러했다. “기준은 강개하여 일을 논할 때면 고려하는 바가 없었고, 늘 임금 앞에서 곧은 말과 격렬한 논의로 듣는 사람들의 귀를 떠들썩하게 했다. 대신들은 대체로 그를 미워했다.”(중종실록 12년) 기준이 남긴 상처는 남은 가족들을 위축시킬 수도 있지만, 더 적극적인 힘이 될 수도 있었다. 아버지 기진이 자식들에게 “자신에게 떳떳하면서 타인과 어울리라”고 한 것은 경험에서 얻은 지혜이다.

기대승 종가 소장 문적. [사진 문화재청]

기대승 종가 소장 문적. [사진 문화재청]

고봉 형제들의 곁에는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워준 외가 여성들이 있었다. 증조가 강희맹(1424~1483)인 어머니 강씨는 조부 대에 전라도에 정착하는데, 13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20대 초반에 기진과 혼인한다. 고봉은 “외조부의 첩인 외조모께서는 가문의 어른으로서 우리를 돌보시며 반드시 대인(大人)이 될 것이니 열심히 글을 읽으라며 나를 격려하셨다”고 했다. 또 외종조모가 돌아가시자 “내가 출세하기를 바랐다면 그것은 외종조모의 봉양을 위해서다.”(『고봉선생연보』) 라며 그가 베푼 사랑을 잊지 않았다. 외가 여성 가족들이 합심하여 고봉 형제들을 돌본 것은 재혼을 하지 않은 채 자녀 양육에 동분서주하는 사위를 위한 배려였을 것이다.

작은아버지 기준의 슬픈 최후

기대승의 작은아버지 기준의 묘소. 경기도 고양시 성사동에 있다. [사진 고양시청]

기대승의 작은아버지 기준의 묘소. 경기도 고양시 성사동에 있다. [사진 고양시청]

고봉의 아버지 기진과 계부(季父) 기준은 기찬(奇襸·1444~1492)의 재취 김씨 소생이다. 김씨는 기준을 낳고 한 달여 만에 남편과 사별하여 홀로 아이들을 길러내는데, 모자가 애틋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기준이 조광조를 종유하며 뜻을 같이하다가 “과격한 논의에 부화뇌동한” 죄목으로 의금부에 갇히게 되었다. 기준은 “뜻이 같은 선비와 옛 성현의 도를 강구하여, 선한 자는 인정해주고 선하지 못한 자는 미워한 일밖에 없었다”(중종실록 14년 11월 16일)며 항변하지만, 왕은 늘 옳은 말만 하며 자신을 가르치려 들던 기준이 그냥 싫었다. 결국 기준은 아산으로 귀양을 가는데, 이때 잠시 어머니를 보려고 유배지를 이탈한 것이 발각되어 서울로 압송 다시 의금부에 갇힌다. 그의 옥중 상소가 『기묘록보유』에 실려 있다.

고봉 기대승

고봉 기대승

“신이 세상에 태어나서 겨우 달(月)을 넘기자 아비가 죽었습니다. 오직 편모에 의지해 양육되어 모자가 서로 보전하며 살아왔습니다. 신이 귀양 간 것을 안 어미는 밤낮으로 울부짖다 병까지 겹쳐 목숨을 보전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어미를 만나보고 싶었으나 국법이 지중하여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급기야 배소를 온성으로 옮기게 되자 이제 끝이라는 생각에 한 번이라도 보고 영결하고 싶었습니다. 모자 사이의 절박한 정을 참지 못하여 이렇게 되었습니다.”(‘기준전·奇遵傳’)

선처를 바라는 상소에도 기준은 적소 이탈죄가 추가되어 북쪽 변경 온성에 위리안치된다. 산무덤 같은 외딴집의 절대 고독 속에서 그는 어머니와 형, 아내와 아들을 그리워하는 ‘옥중사가(獄中四歌)’를 남기는데, 제대로 안아보지도 못한 아들에게는 ‘아버지의 기도’를 올린다.

“아들이여, 아들이여! 강보에 싸인 너! 아비 어미 못 가려도 영리하고 총명하여/ 밝은 구슬 빛이 나듯 절로 보배 될 것이니, 성취할 그 날 참으로 아득하구나/ 시서(詩書) 천 권 너에게 남겨 주니, 가족 사랑 남은 힘은 모름지기 호학(好學) 하렴.”

아내와의 행복한 노후 꿈꿨지만…

기준은 왕명으로 교사(絞死)에 처해지는데, 나이 겨우 서른이었다. 그의 아들 기대항(1519~1564)은 성장하여 아버지처럼 젊은 나이에 대과에 급제하고, 벼슬은 한성부판윤(정2품)에 이르렀다. 기대항은 평소 “너그러움과 용서를 근본으로 삼고 세세히 살피는 것을 현명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한성부판윤기공행장’) 아버지의 단처(短處)를 깊이 새겨 갈고 닦은 것이다. 이렇게 조심스럽게 이어져 오던 행주 기씨 기준의 계보는 증손 기자헌과 현손 기준격이 무고와 암투를 주도한 대가를 치르며, 거의 모든 핏줄이 사사되어 사실상 멸문으로 막을 내린다.

한편 아우 기준을 잃고 속세를 떠났던 형 기진은 다시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의 양육과 교육에 후반의 인생 30년을 바친다. 가족이라는 시공간을 자원으로 성장한 아들 고봉은 학문과 정치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가족생활도 봄바람처럼 훈훈했다. 고봉은 “밤이 되면 등잔불 아래에서 그대와 함께, 도란도란 얘기 나눌 만년의 여유를 기약하오”(‘취증세군·醉贈細君’)라며 아내와의 행복한 노후를 꿈꾸었다. 하지만 한창나이 46세에 병이 나 대사간(정3품) 벼슬을 내려놓고 광주 집으로 가던 도중에 운명하고 만다. 태인(泰仁)에 이르러 사태를 직감한 그는 “며느리 집도 내 집”이라며 인근에 있던 사돈 김점(金坫)의 집에서 죽기를 원해 그곳에서 수십 명 문인의 배웅을 받으며 짧지만 굵은 삶을 마감한다.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