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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 해외출장, 골프장 회의…논란의 사외이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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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1. 대기업 A사의 사외이사 B씨는 지난달 남미를 방문해 생산 현장과 인근을 둘러봤다. 하지만 사외이사 임기를 한 달여 앞두고 있어 그의 출장은 입길에 올랐다. 이 회사 내부에선 “거액의 항공료와 체재비를 들이고, 직원까지 동행해 현장을 시찰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나왔다.

#2. 중견기업 C사는 연 2회 이사회를 골프장에서 연다. 사외이사와 사내 인사 간 친목을 다지기 위한 성격이 짙다. ‘골프장 이사회’에서 논의하는 안건은 최대한 동의하기 쉬운 내용으로 골라가는 것이 기본이다.

정부가 최근 기업 지배구조를 살펴보겠다고 공언하면서 사외이사 운영도 도마 위에 올랐다. 재계에선 사외이사 제도 운용 실태를 함께 점검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일부 사외이사가 ‘갑(甲)’ 행세를 하고 있어 논란이 되기도 한다. D금융지주사의 사외이사 E씨는 사내에서 ‘상왕(上王)’으로 불린다. 이 회사 관계자는 “명확한 오너십이 없는 기업이다 보니 E씨가 노조와 사실상 결탁해 노조의 민원을 해결해주는 역할을 한다”며 “(E씨가) 노조를 등에 업고 회사 내 현안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전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한 회사에서 장기 재직하거나 ‘물려주기’ ‘갈아타기’하는 사례도 있다. 상법은 사외이사에 대해 한 상장회사에서 6년, 계열사 포함해 9년으로 임기를 제한하고 있다. 한 기업에서 장기 재직을 막기 위해서다. 지난 2020년 이런 내용의 시행령이 개정되자 영풍정밀(김선우·16년), 영풍(장성기·계열사 포함 15년), 한진칼(이석우·계열사 포함 13년) 등 10년 이상 장기 재직한 사외이사들이 줄줄이 퇴임했다. 하지만 일부 사외이사는 최장 9년까지 한 기업(계열사 포함)에 재직하기도 한다.

일부 기업의 사외이사는 자신의 후임을 뽑는 사외이사추천위원회에 위원으로 참가해 인선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렇다 보니 사외이사직이 교수나 유명 인사의 노후 대책과 부수입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지적도 있다. 현행법상 2개 기업까지 겸직이 되는 만큼 기업의 형태나 성격을 가리지 않고 사외이사 제안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아서다.

임기가 끝나면 곧바로 다른 기업 사외이사로 자리를 옮기는 경우도 있다. 재계 관계자는 “회사의 민감한 정보가 유출될 위험도 있다”고 말했다.

거수기 역할은 오랫동안 지적된 문제점이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자산 5조원 이상 67개 대기업 계열사 2521개사(2021년 5월~2022년 4월)의 이사회 상정 안건 중 원안대로 가결된 비율이 99%인 것으로 집계됐다. 기존 경영진에 대해 견제와 감시를 해야 하지만 사실상 거수기 노릇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일각에선 지나치게 과도한 보수를 문제 삼기도 한다. 사외이사의 평균 연봉은 보통 수천만원 수준이다. 하지만 1년에 이사회 개최일이 10일 안팎이고, 이사회 참석 때마다 각종 회의비·교통비 등을 지급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억대 연봉을 받는 사외이사가 많다. 보수와 별도로 식대·골프·해외여행 등 경비를 받기도 한다.

이 때문에 기업이 사외이사들을 위해 지출하는 비용은 연간 수억대에 이른다. 이사회 업무를 담당하는 A대기업 관계자는 “주말에도 사외이사들이 연락 오면 만사를 제쳐놓고 이들의 요구를 들어줘야 한다”며 “골프 부킹이나 식당 예약 등 공식적인 업무 외의 일도 상당하다”고 말했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오너가 있는 대기업의 경우 사외이사를 오너가 사실상 뽑는 전횡을 막기 위해 소수 주주의 비토권을 허용하는 ‘MoM(majority of minority) 룰’을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른바 주인 없는 기업의 경우에는 기관투자가, 특히 국민연금이 사외이사 선출과 평가에 스튜어드십 코드(투자 기업의 의사 결정에 적극 참여하는 것)를 엄밀히 적용해 나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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