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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안무가와 우크라 무용수 만남…전세계 '지젤'에 주목한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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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세이 라트만스키(55)가 재창조한 '지젤'의 한 장면. 로이터=연합뉴스

알렉세이 라트만스키(55)가 재창조한 '지젤'의 한 장면. 로이터=연합뉴스

1일(현지시간)부터 미국 워싱턴DC에서 막을 올린 발레 공연 '지젤'은 단순히 애절한 사랑 이야기 그 이상이다. 곧 1년을 맞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도 함의가 맞닿아있다. 우크라이나 국립 발레단 출신의 무용수들이 네덜란드로 망명해 현지에서 활동하다, 전쟁 발발 후 처음으로 여는 해외 투어 공연이다. 뉴욕타임스(NYT)부터 공영 라디오 방송 NPR까지 앞다퉈 이번 공연을 주목하는 까닭이다. 고국을 그리워하는 우크라이나 무용수들이 '지젤'을 고른 이유는 뭘까. 이들이 선택한 버전은 알렉세이 라트만스키(55)가 재창조했다. 핵심은 희망의 메시지. 지젤이 알브레히트를 살려내고 무덤 속으로 되돌아가는 잘 알려진 버전과 달리, 지젤이 되살아남을 암시하는 버전이다.

우크라이나 무용수들이 지난 1일 미국 워싱턴DC 케네디센터에서 '지젤' 공연 중이다. AFP=연합뉴스

우크라이나 무용수들이 지난 1일 미국 워싱턴DC 케네디센터에서 '지젤' 공연 중이다. AFP=연합뉴스

엔딩도 엔딩이지만, 더 중요한 요소는 안무가 라트만스키라는 존재다. 라트만스키는 러시아 출신 미국 예술가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볼쇼이 발레단에서 무용수를 거쳐 안무가와 예술감독이라는 최정상 자리까지 올랐다. 마린스키와 함께 러시아를 대표하는 볼쇼이 발레단은 그가 2004~2008년 감독을 역임하면서 예술적으로도 진일보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젤'부터 '파키타'까지, 고전 발레 작품을 그가 재해석해 올린 작품 역시 호평을 받았다.

알렉세이 라트만스키(오른쪽). 2020년 아메리칸발레시어터 재직 당시. AP=연합뉴스

알렉세이 라트만스키(오른쪽). 2020년 아메리칸발레시어터 재직 당시. AP=연합뉴스

그러나 라트만스키는 2014년 러시아를 떠난다. 그가 향한 곳은 미국. 그는 NYT 등 다수 매체에 "미국 발레를 부흥시켰던 조지 발란신의 존재가 (미국행에) 큰 영향을 줬다"고 말했다. 발란신 역시 러시아 출신이지만 뉴욕시티발레단( 공동 설립하며 '주얼스' 등 아름다운 작품으로 미국을 넘어 세계 발레계의 새 역사를 썼다.

라트만스키는 제2의 발란신을 꿈꾸며 '러시아계 미국인'으로 새 삶을 개척한다. 처음엔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의 안무가로 활약하며, 고전적 테크닉과 현대적 감성을 살린 신작을 내놓는다. 그러다 지난달, 그의 아메리칸 드림이었던 뉴욕시티발레단으로 적을 옮겼다. 그는 이적과 관련, 무용 관련 팟캐스트에 출연해 "솔직히 뉴욕시티발레단에서 어떤 새로운 일이 벌어질지는 모르지만, 그래서 더 설레고 신이 난다"고 말했다고 NYT는 전했다.

조지 발란신(오른쪽)은 러시아에서 태어난 미국 발레의 아버지 격 인물. "음악을 보고 춤을 들어라"는 등의 명언을 남겼다. [중앙포토]

조지 발란신(오른쪽)은 러시아에서 태어난 미국 발레의 아버지 격 인물. "음악을 보고 춤을 들어라"는 등의 명언을 남겼다. [중앙포토]

이런 라트만스키에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외면하기 어려운 아픔이다. 그는 볼쇼이 이전, 우크라이나 국립발레단에서 수석무용수로 활약하며 20대 한창때를 보냈기 때문이다. 이번 미국 '지젤' 공연을 하는 우크라이나 무용수들이 그의 후배들인 셈. 라트만스키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이번 공연의 성사도 어려웠을 수 있다. 라트만스키는 NYT가 지난 1일 게재한 기사에서 "이번 '지젤' 공연은 우크라이나의 모든 국민이 한마음이 되어 각자의 전쟁을 치르고 있음을 의미한다"며 "무용수들은 무대에서 온 맘과 몸을 다해 평화를 갈망하는 메시지를 보낼 것이며, 나도 이들을 전폭 지지한다"고 말했다.

무대에 오르는 우크라이나 무용수들의 어깨는 그래서 더욱 무겁다. 무용수 베로니카 라키티나는 NYT에 "우크라이나에 남아있는 친구들의 말을 들으면, 전쟁으로 힘든 와중에도 발레 공연으로 마음을 달래고 싶어하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며 "멀지만 미국에서 고국을 위해 정성을 다해 춤을 추겠다"고 말했다. 일부는 이번 공연이 끝나면 총성이 여전한 우크라이나로 돌아갈 계획이라고 한다. 크세니아 노비코바 무용수는 NYT에 "(약 1년 전 러시아 발) 포탄이 바로 내 집 앞에 떨어져 폭발하면서 그때까지의 나는 죽었다"며 "이제 새 삶을 평화를 위한 전투를 위해 무대에서 보낼 것이고, 그렇기에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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