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사라졌다" 한글 삐뚤빼뚤…우크라 아이들 '울분의 일기장' [우크라이나 르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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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넘긴 전쟁의 참상…다시 우크라이나를 가다

‘신냉전’의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 21세기 세계사의 축소판. 유럽 대륙의 데탕트를 깨뜨리고 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상징하는 현실이다. 양측 사상자는 그새 20만명을 넘었고 피란민은 1000만명을 헤아린다.
이 비극에 끝은 있는가. 해를 넘겨 장기전 조짐마저 보이는 이 전쟁을 현지 사람들은 어떻게 견뎌내고 있을까. 전쟁 발발 직후 우크라이나·폴란드 접경지역 피란 현장을 찾았던 중앙일보가 개전 1년 시점에서 우크라이나 속으로 들어가 전쟁의 참상을 전한다.

“2022년 3월 1일. 저는 지하실에서 보냈어요. 겨울이 끝났지만 알지 못했어요….”

“2022년 3월 8일. 사이렌이 울려요. 하나, 둘, 셋…. 멀리서 폭발음이 들어(려)요. 약이 필요해서 계속 서 있어요. 약국은 몇 시간만 문을 열어요.”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 사는 스무 살 마리아가 지난해 2월 러시아의 침공 이후 서툰 한국어로 삐뚤빼뚤 써내려간 일기장이다. ‘제 봄이에요’라는 제목이 붙은 이 일기는 우크라이나 현지의 한국인 교사 안나(현지 이름)가 편집한 책 『2022년 봄 나의 일기』에 수록돼 있다.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아서, 한국 기업에 취직하고 싶어서” 1~3년 전부터 한국어를 배워 온 10~20대 학생들이 러시아의 공습 속에 써내려간 ‘키이우의 일기’다. “저의 봄이 짧지만 어려웠어요. 많이 울고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나의 봄은 사라졌다.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지만, 긴장을 견딜 수 없다” 등을 고백했다.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의 한 가정집에서 정전이 시작되자 11살 파제이가 배터리를 사용하는 전구를 켜고 있다. 김홍범 기자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의 한 가정집에서 정전이 시작되자 11살 파제이가 배터리를 사용하는 전구를 켜고 있다. 김홍범 기자

안나 교사는 서문에 “어린 학생들의 경험을 직접 전하기 위해서 글의 문법상, 맞춤법상 오류를 수정하지 않고 책에 그대로 실었다”고 썼다. 기자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1년을 맞아 지난달 31일(현지시간) 키이우를 찾았을 때 마이단 광장 인근의 한국교육원 강의실에서 이 책을 입수했다. 한국 언론에 처음 공개된다.

서툰 한글 일기 속, "나의 봄은 사라졌어요"

지난해 12월 한국어를 배우는 우크라이나 학생들의 일기를 모아 출판된 『2022년 봄 나의 일기』 속 학생들의 손글씨 편지. 김홍범 기자

지난해 12월 한국어를 배우는 우크라이나 학생들의 일기를 모아 출판된 『2022년 봄 나의 일기』 속 학생들의 손글씨 편지. 김홍범 기자

지난해 2월 24일 터진 전쟁은 그 누구보다 청소년들의 일상을 파탄냈다. 소피아 콜리아덴코(16)는 일기에서 2월 26일 생일 파티가 피란 통에 미뤄진 걸 아쉬워했다. 천신만고 끝에 인근 도시 보로댠카로 대피했지만 그곳에도 러시아 탱크가 들어와 있었다. 탱크를 72대까지 셌다고 썼다. “26일 모두가 제 생일을 축하하기로 했지만 다들 완전히 잊어버렸어요. 우린 지하실에서 밤을 새웠어요.”

지난 1월 11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 위치한 주우크라이나 한국교육원에서 지난해 12월 출판된 『2022년 봄 나의 일기』 필자 모임이 열렸다. 사진 주우크라이나 한국교육원

지난 1월 11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 위치한 주우크라이나 한국교육원에서 지난해 12월 출판된 『2022년 봄 나의 일기』 필자 모임이 열렸다. 사진 주우크라이나 한국교육원

일찍 자란 아이들, 어리광 대신 모금 활동 

지난해 11월 말 전선에 보낼 식량과 물품을 정리하는 사샤(왼쪽)와 파제이. 김홍범 기자

지난해 11월 말 전선에 보낼 식량과 물품을 정리하는 사샤(왼쪽)와 파제이. 김홍범 기자

키이우의 평범한 가정집에서도 ‘잃어버린 일상’은 쉽게 목격됐다. 지난달 31일 오전 9시쯤 기자가 사샤(13)와 파제이(11) 남매의 집을 찾았을 때 갑작스레 정전됐다. 하루에도 4~5시간씩 벌어지는 일이란다. 파제이는 익숙한 듯 어둠 속을 뒤져 “단전 때 쓰는 전구”라며 비상용 배터리를 켰다.

‘웨에엥-.’ 오전 11시, 창 밖에서 공습경보가 요란하게 울렸다. 아이들은 서둘러 창가에서 가장 먼 방으로 기자를 이끌었다. 공습경보엔 인근 지하철 등 방공 시설로 이동하는 게 원칙이지만 하루에도 몇번씩 울리는 탓에, 웬만해서는 집 안에 머문다고 했다. 휴대전화에서 시끄럽게 울리는 ‘삐-,삐-.’ 경보에 잔뜩 긴장한 기자와 달리 아이들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다.

지난달 31일(현지시간) 방문한 사샤와 파제이 남매의 아파트는 정전으로 휴대전화 불빛에 기대 길을 찾아야 했다. 김홍범 기자

지난달 31일(현지시간) 방문한 사샤와 파제이 남매의 아파트는 정전으로 휴대전화 불빛에 기대 길을 찾아야 했다. 김홍범 기자

전쟁은 아이들을 ‘애어른’으로 키웠다. 파제이는 “아버지가 전선에 있어 걱정은 되지만,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얼른 러시아를 무찌르고 돌아오시길 바란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남매의 부친 알렉산드르(40)는 전쟁 전까진 지역 라디오에서 근무하다가, 개전 이후 군에 들어가 최전선인 동부 바흐무트에서 싸우고 있다. 지난해 6월 26일 하르키우 전선에서 포격 파편에 맞는 부상을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남매는 요즘 전선에 보낼 군용 헬멧을 사기 위해 아파트 주민들을 상대로 모금 활동을 하고 있다.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사샤와 피제이 남매의 아버지 모습이 담긴 사진. 부친 알렉산드르(40)는 개전 직후 자원입대해 현재는 동부 최격전지 바흐무트에서 싸우고 있다. 사진 속 2명의 전우는 이미 사망했다. 김홍범 기자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사샤와 피제이 남매의 아버지 모습이 담긴 사진. 부친 알렉산드르(40)는 개전 직후 자원입대해 현재는 동부 최격전지 바흐무트에서 싸우고 있다. 사진 속 2명의 전우는 이미 사망했다. 김홍범 기자

스트레이키즈 팬이라며 웃던 마야 “우린 유럽인”

유니세프 우크라이나 지부에 따르면 이번 전쟁에 노출된 700만 명의 우크라이나 아동 가운데 150만 명이 트라우마 등 심각한 정신 질환의 위험에 처해 있다. 전국 3600곳의 학교와 유치원이 파괴되면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평생의 상흔이 될 수 있고, 사회적으로도 어려움이 될 수 있다. 독일 시사 주간지 슈피겔은 지난달 “우크라이나는 한 세대 전체를 잃을 위기에 처해있다”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부인 올레나 젤렌스카 여사는 지난해 10월 유니세프 연설에서 “우크라이나의 어린이들은 예기치 않게 성숙해지고 있지만, 그들은 여전히 취약한 아이들”이라며 “전쟁이 그들의 미래를 망치도록 해선 안 된다”며 국제 사회의 지원을 호소했다.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방문한 우크라이나 키이우 리쩨이 마웁 스콜라의 학생들. (왼쪽 아래) 15살 마야는 기자의 방문에 대번에 한국인이라는 점을 알아채며 웃으며 인사를 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진지한 표정으로 ″우린 첫 째로는 우크라이나인, 그 다음은 유럽인이다. 러시아와는 다르다″고 설명했다. 김홍범 기자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방문한 우크라이나 키이우 리쩨이 마웁 스콜라의 학생들. (왼쪽 아래) 15살 마야는 기자의 방문에 대번에 한국인이라는 점을 알아채며 웃으며 인사를 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진지한 표정으로 ″우린 첫 째로는 우크라이나인, 그 다음은 유럽인이다. 러시아와는 다르다″고 설명했다. 김홍범 기자

학교를 다시 열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지난달 30일 기자가 찾은 키이우의 ‘리쩨이 마웁 스콜라’는 유치원부터 고교 과정까지 운영하는 비교적 큰 교육 기관. 전쟁 전엔 660명의 학생이 등교했지만, 지금은 3분의 1 정도만 학교에 온다. 젤렌스카 조야 페트로브나 교장은 “공습경보에도 학습이 중단되지 않도록 지하실에 교육용 스크린을 설치하고 학생들의 책걸상을 배치했다”고 말했다.

기자가 교실에 들어서자 마야(15)가 대뜸 한국어로 “안녕하세요! 반가워요”라고 인사했다. “한국인인 것을 어떻게 알았냐”고 묻자 영어로 “(한국 아이돌 그룹)스트레이키즈를 좋아한다”고 답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태극기 그리기 등 한국 문화에 대해 배웠다고 한다.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방문한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의 리쩨이 마웁 스콜라에는 이처럼 지하 방공 시설 내에 수업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수시간씩 이어지는 공습경보에도 학습을 할 수 있도록 했다. 김홍범 기자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방문한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의 리쩨이 마웁 스콜라에는 이처럼 지하 방공 시설 내에 수업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수시간씩 이어지는 공습경보에도 학습을 할 수 있도록 했다. 김홍범 기자

김홍범 기자

김홍범 기자

마야에게 ‘우크라이나 사람으로서 러시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했더니,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우린 러시아와 별개의 사람들이에요. 가장 먼저 우크라이나인이고, 그 다음으로 유럽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샤도 비슷하게 말한 바 있다. “학교에선 애들이 다들 ‘망할 푸틴’이라고 해요.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아니에요. 우크라이나는 그냥 우크라이나에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이번 전쟁의 명분으로 우크라이나가 ‘같은 역사·영토를 공유해온 슬라브 민족’이란 점을 강조했지만, 첫 전후 세대가 될 이들에겐 ‘내 나라’와 ‘침략국’만 존재하는 듯했다.

※우크라이나 르포 3회는 2월3일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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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1년을 맞아 중앙일보가 2월 1일부터 디지털 아카이브 페이지를 오픈했습니다. 전쟁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이 비극에 끝은 있는지, 서방의 우크라이나 지원과 러시아의 맞대응 등 지난 1년의 기록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디지털 아카이브 보기 ☞ https://www.joongang.co.kr/digitalspecial/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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