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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 "차이콥스키도 듣지 말자" 러시아 문화도 증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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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미국 시카고의 우크라이나현대미술관(UIMA)은 지난해 12월 17일부터 이달 17일까지 '전쟁의 아이들'이라는 전시회를 개최하고 있다. 모두 우크라이나 어린이들이 그렸다. UIMA 캡처

미국 시카고의 우크라이나현대미술관(UIMA)은 지난해 12월 17일부터 이달 17일까지 '전쟁의 아이들'이라는 전시회를 개최하고 있다. 모두 우크라이나 어린이들이 그렸다. UIMA 캡처

우크라이나 서부 르비우에 살고 있는 베로니카(10)는 작년 러시아의 포격으로 한쪽 눈을 실명했다. 공습에서 엄마·아빠는 사망했고, 홀로 살아 남았다. 베로니카는 최근 지역의 미술 치료 교실에 참석해 알록달록한 드레스를 입고 있는 자신을 그렸다. 그 뒤엔 “전쟁에서 죽은 모든 친구들이 같이 살 수 있는 집”도 함께 그려 넣었다.

미술 치료를 맡은 나탈리아 파블류크(45)는 지난달 뉴욕타임스(NYT)에 “심각한 사건을 경험한 아이들일 수록 밝은 색깔의 그림을 그리곤 한다”며 “이럴 땐 눈물을 참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베로니카를 비롯한 우크라이나 아동들의 그림은 미국 시카고의 우크라이나현대미술관에 걸렸다. 작년 12월 17일 시작된 이번 전시는 이달 17일까지 계속될 예정이다.

2022년 2월 시작된 러시아의 침공을 성장기에 겪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전후 세대’는 1991년 8월 우크라이나가 소련에서 독립한 이후 태어났다. 이들은 케이팝(k-pop)을 듣고 넷플릭스를 보며,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이용하는 등 서구의 문화를 즐긴다. 성장 과정에서 러시아에 대해 부정적인 경험을 주로 한 것도 이전 세대와 차별화된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친러 대선 후보를 축출한 2004년 오렌지 혁명, 대학생들이 유럽연합(EU) 가입을 요구한 유로마이단 혁명(2013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강제 병합(2014)까지 일련의 사건들은 젊은층을 러시아에 등 돌리게 만들었다. 나아가 전쟁은 거부감을 원한으로 바꿔놨다. 이리나 오시펜코(25)는 유로뉴스에 “난 러시아를 미워하며, 나중에 내 아이들도 이 순간을 기억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특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정체성을 말살하기 위해 어린이를 타깃으로 잡으면서 한 세대 전체가 치명적 위기에 놓였다. 우크라이나 국가정보국에 따르면 지난해 2월 이후 1만 3000여 명의 어린이가 러시아로 강제 이주된 것으로 파악된다. 지방자치단체에 부모들이 신고한 실종 건수는 수십 만을 헤아린다. 특히 동부 지역의 피해가 컸다고 한다. 인권 단체 국제앰네스티는 이와 관련해 “러시아의 어린이 강제 이주와 (고향에서의)추방 조치는 비난 받아야 할 전쟁 범죄”라는 성명을 작년 11월 냈다.

우크라의 미래 끌어가는 러시아…“전쟁 범죄”

지난해 10월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에서 한 남성이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에 살고 있는 어린이들에 관한 사진전을 지나고 있다. ″돈바스의 눈망울들을 보라″는 내용이다. EPA=연합뉴스

지난해 10월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에서 한 남성이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에 살고 있는 어린이들에 관한 사진전을 지나고 있다. ″돈바스의 눈망울들을 보라″는 내용이다. EPA=연합뉴스

이에 맞서 우크라이나 정부도 자국 내 러시아 언어·문화를 뿌리 뽑겠다고 나섰다. 올렉산드르 트카첸코 우크라이나 문화부 장관은 지난해 12월 7일 영국 가디언 기고문을 통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전세계가 (러시아 제국의 낭만주의 작곡가인) 차이콥스키를 포함한 러시아 음악 공연, 전시회를 보이콧 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는 “러시아는 단순히 우크라이나를 물리적으로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문화, 역사를 지우려 한다”며 “이 전쟁은 문명의 전쟁”이라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의 독립적인 역사를 구축하고, 공식 석상에서 러시아어를 몰아 내겠다는 의지다.

이에 힘 입어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어 사용 빈도는 크게 줄고 있다. 캐나다우크라이나연구소의 지난해 12월 조사에서 응답자의 58%가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어의 구사는 전혀 중요치 않다”고 응답했다. 똑같은 질문을 2014년 크림반도 사태 때 했을 땐 9%만 그렇다고 답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체호프나 도스토옙스키 같은 러시아 문학가들은 부모 세대의 구전에나 존재할 뿐이다. 『체르노빌의 목소리』 등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최근 일본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전쟁으로 우크라이나 젊은이들이 러시아 예술을 싫어하고 꺼리게 됐다. 그게 슬프다”고 말했다.

2013년 11월 26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의 마이단 광장에서 열린 EU 통합 지지 집회에 시위대가 참석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2013년 11월 26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의 마이단 광장에서 열린 EU 통합 지지 집회에 시위대가 참석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우크라 민족주의 일깨운 전쟁, EU 가입 열망도↑

전쟁은 우크라이나 고유의 민족 정체성을 젊은 세대에게 일깨우고 있다. 현지 연구 기관 키이우국제사회학연구소가 수행한 소속감에 관한 여론조사에서 “나는 우크라이나의 시민”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2021년 62.6%에서 지난해 전쟁 발발 이후 79.7%까지 올라갔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러시아에 대한 역사적 소속감도 세대차가 두드러진다. 미 조지메이슨대 연구팀이 ‘(소련의 상징물인)블라디미르 레닌 동상 철거 문제에 관한 입장’을 물은 결과 60세 이상은 전쟁 이후에도 38%가 “철거를 반대한다”고 답했다. 18~29세에서 반대 의견은 19%에 불과했다. 러시아 영향력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였던 레닌 동상은 우크라이나 전역에 한때 2600개까지 세워졌다가 최근 철거되는 추세다.

러시아에서 멀어질수록 우크라이나는 유럽연합(EU) 쪽으로 기울고 있다. 비영리단체 새로운유럽센터가 2017년 우크라이나 14~29세 2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60%는 “EU에 가입해야 한다”고 답변했다. 이들의 54%는 “일자리 기회가 있을 것 같아서” EU 가입에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EU 가입이 우크라이나의 민주화에 기여할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우크라이나는 전쟁 발발 직후 EU 가입 절차에 공식 착수했다.

용어사전오렌지혁명

 2004년 11월~12월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시민불복종 시위. 친러 성향 후보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대선 결선 투표에서 승리한 것을 두고 부정선거 의혹 제기, 대법원에 의해 무효화 됨. 이에 친 서방파 후보였던 빅토르 유셴코 지지자들이 부정선거 반대, 민주주의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고, 재투표 결과 유셴코가 당선됨. 오렌지색은 유셴코 캠프의 색깔.

용어사전유로마이단 혁명

2013년 11월~이듬해 초까지 90여일 간 지속된 반정부 시위. '유로 마이단'은 유로(Euro)와 우크라이나어로 독립 광장을 의미하는 마이단(Maidan)의 합성어.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와 EU 간 자유무역협정(DCFTA) 서명을 무기한 연기하고, 러시아와의 경제적 협력을 발표하자 대학생들이 수도 키이우의 독립 광장(마이단)에 모여 반정부 시위를 벌임. 2014년 2월 27일 야누코비치가 러시아로 망명하면서 일단락.

'러·우크라 전쟁 1년' 디지털 스페셜 만나보세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1년을 맞아 중앙일보가 2월 1일부터 디지털 아카이브 페이지를 오픈했습니다. 전쟁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이 비극에 끝은 있는지, 서방의 우크라이나 지원과 러시아의 맞대응 등 지난 1년의 기록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디지털 아카이브 보기 ☞ https://www.joongang.co.kr/digitalspecial/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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