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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사우디아라비아의 신기한 신도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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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숲은 침묵의 전쟁터다. 나무들도 치열하다. 숲이라고 먹고 사는 문제에서 자유로운 공간이 아니다. 뿌리로 물 흡수하고 잎으로 광합성 하면 된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런데 나무의 생존인들 그런 무책임한 문장처럼 간단할 리가 없다.

광합성을 위해서는 최대 면적에 잎을 피우고 빛을 받아야 한다. 그러면 나무는 가분수 구조가 되어 바람에 취약해진다. 물과 양분이 공급되는 수관의 길이는 최소화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잎은 좁은 체적에 모이는 것이 합리적이다. 결국 나무는 튼튼한 밑동에 의지해서 최소한의 공간을 빼곡히 채운 모습이 되었다. 동물도 세포에 혈관을 통한 영양공급이 필요하다. 충분히 먹고 적게 소모해야 한다. 그래서 에너지 손실을 줄이려면 외피 면적이 줄어야 한다. 이 원칙을 만족시키지 못한 돌연변이들은 자연의 선택을 받지 못해 사라졌다.

유기체는 치열한 생존의 결과물
도시도 작동방식으로는 유기체
절대왕정 국가의 신도시 제안
유기적 작동 부인하는 도시 개념

도시도 유기체같이 치열한 생존 조건을 가졌다. 세포가 순환계에 연결되듯 모든 필지도 도로에 접속되어야 한다. 토지 이용의 합리성을 위해서는 외부 접촉면이 줄고 접속도로도 짧아야 한다. 도시가 유기체와 다른 점은 순환계의 방향성이다. 혈액은 일방향 공급이지만 도로는 양방향 순환이 원칙이다. 그래서 촌락은 대개 수형(樹型) 구조에서 출발하나 도시구조는 일반적으로 격자형으로 수렴된다. 격자구조는 위계가 불분명하다. 최초의 민주국가 미국의 계획도시들이 기계적 사각 격자 가로를 선택하는 근거도 그것이었다.

순환계가 바뀌면 생체구조가 변하게 된다. 바퀴가 도로를 지배하면서 도시는 점점 거대해졌다. 불평등이 커졌고 오염과 질병으로 골치였다. 세상에 대한 불만이 쌓이면서 새로운 도시를 꿈꾸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20세기 초반 유럽의 건축가들은 당나귀가 다니던 굽은 길을 밀어내고 새로운 교통기계가 질주하는 도시를 제시했다. 공장이 아니라 공원이 많은 도시였다. 물론 이상적 사회는 당연히 새로운 공간에 담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전부터 있었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가 그것이고 홍길동의 ‘율도국’도 그런 꿈의 표현이었다.

20세기 후반 세계의 신도시들은 20세기 초 건축가들이 꾸던 꿈의 구현장이었다. 아시아 동쪽 끝의 나라도 그런 원칙이 바탕에 깔린 신도시들을 만들었다. 공원이 선망되고 바퀴를 숭상하는 도시다. 지형에 따라 달라져도 결국은 격자구조에 기반을 둔 도시였다. 그런데 21세기 초반 그 나라에서 좀 신기한 도시 관련 사건이 벌어졌다. 어떤 대통령 입후보자가 득표 전략으로 충청도에 행정수도를 조성하겠다고 공약했다. 그걸로는 좀 부족했는지 부산은 해양수도, 광주는 문화수도로 만들겠다고 했다. 그런데 덜컥 그가 당선되어버렸다. 마른 참나무 장작 지핀 아궁이처럼 국론이 튀고 끓었다. 최고 권력자도 지속적인 견제·비난·타박의 대상인 나라임이 증명되었다. 틀림없는 민주국가였다.

행정수도는 행정중심복합도시라는 이름으로 애매하게 타협이 되었다. 또 신도시가 필요해졌다. 초대형 사안이라 도시 형태에 대한 국제아이디어공모전이 있었다. 전 세계 건축가들의 관심사였다. 민주주의로 유지되는 평등한 사회, 이걸 담는 도시로 중심 없는 반지 모양의 구조 제안들이 몇 있었다. 나중에 세종시로 이름을 얻는 그 도시구조로 과연 반지 모양이 선택되었다. 나무로 치면 둥치가 없고 가지로만 이루어진 도시다. 수도이전이 불 지핀 균형발전 주장의 공박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러나 도시의 형태로만 보면 이건 민주주의에 대한 전례 없이 명쾌하고 야심 찬 공간적 선언이었다. 물론 완벽하게 균등한 분포는 아니니 염주 같은 도시라고 하면 더 옳을 것이다. 격자건, 반지건, 염주건, 전제는 도시가 여전히 기민한 유기체로 작동한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아시아 서쪽 끝의 나라에서 좀 뜬금없는 신도시가 제시되었다. 길이 170킬로미터의 긴 장벽 도시다. 사막에 조성된 숲속 도시라는데 유기체로 작동하는 도시가 아니라 추상적 도형으로서의 도시가 제시된 것이다. 그것은 수천 년 이어온 유기체 도시에 대한 용감한 반박이었다. 그러나 제안의 근거는 도시에 대한 혜안은 아니고 절대 권력과 천문학적 재산이었다. 이곳은 권력 견제가 허용되지 않는 절대왕정 국가다. 그런데 먼 나라의 이 신도시가 먼 이야기가 아닌 것은 건설 물량 때문이다. 당연히 건설산업의 관점에서는 수주 기회를 위해 영혼도 팔아야 하는 게 대한민국의 처지다. 그러나 그 신도시가 신세계인지, 신기루인지의 판단은 다른 이야기다.

그런 신도시의 수요와 작동 여부는 쌀가게 계산기로도 검증할 수 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묻힌 석유를 팔아서는 그런 도시를 조성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 도시에 대한 투자 요청이 진행 중이다. 투자는 자본 여력이 있는 나라에서 와야 할 것이다. 그런데 대개 그런 나라는 민주정 국가들이고 그 덕에 선진국들도 되었다. 민주국가는 대체로 자유로우니 세금집행을 통한 이런 화끈한 도시 조성을 선거공약으로 내거는 입후보자도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런 공약으로 당선 가능한 나라에서는 이 신도시에 투자해도 되겠다.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