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시론

위기의 한반도, 남북관계 새로 정립해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9면

이백순 전 주호주대사

이백순 전 주호주대사

대한민국 대통령이 평양과 백두산을 방문했을 때, 시드니 올림픽에 남북 선수단이 한반도기를 앞세워 공동입장했을 때, 평창 동계올림픽에 북한 응원단이 방문했을 때 우리는 마치 통일이 가까이 다가온 것 같은 감격에 젖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비현실적인 환상에서 깨어날 시점이다. 우리 앞길에는 통일의 장밋빛보다 전쟁의 핏빛이 드리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막연히 통일을 외치거나, 북한을 흡수 통일할 수 있다거나, 북한이 붕괴할 것이라는 희망적 사고에 사로잡히면 국가 안보는 더욱 위험해지고 전쟁 가능성은 더 높아질 것이다.

남북한 통일이나 북한과 우호·협력 관계를 추진하는 것이 얼마나 실현하기 어려운 일인지는 작금의 국제정세를 조금만 짚어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첫째,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북한은 사실상 핵보유국이고 핵을 포기할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그러면 통일은 불가능한 일이 된다. 북한이 핵을 가진 채 미국과 화해하기 불가하고, 핵을 가진 북한을 두고 일본이 한반도의 통일을 지지할 가능성이 없다.

‘통일지향 특수관계’는 비현실적
북핵·미중대립 속 안보위험 고조
정상국가 관계 전환이 장점 많아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둘째, 한반도를 둘러싼 신냉전 구도는 날이 갈수록 더 강고해질 것이다. 미·중 패권 경쟁은 더욱 장기화할 것이고, 한·미·일 남방 삼각연대와 북·중·러 북방 삼각연대의 대립구도는 더 심화할 것이다. 이는 한반도 통일을 위한 남·북 내부 구심력이 약화하는 가운데 이를 막는 외부 원심력이 더 강해진다는 말이다.

셋째, 북한은 핵보유국 지위를 기정사실로 하고 심지어 지난해 9월엔 핵을 선제사용할 수 있다고 천명했다. 1990년 이후 열세에 있던 남북한 관계를 북한은 핵무장을 통해 역전시킬 수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나아가 북한은 핵 공갈이나 제한적 핵 무력 사용을 통해서 남한을 굴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면 남북대화에 순순히 응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제반 상황을 고려할 때 이제는 남북한 통일과 화해·협력을 지향하기보다 남북한 관계를 새로운 틀에서 재정립하는 방안을 고민해야 할 때다. 즉, 남북한 관계를 1992년 발효된 남북 기본합의서에서 규정한 ‘통일을 지향하는 잠정적 특수관계’로 두지 말고 ‘정상국가 간 관계’로 만들자는 말이다. 남북한이 유엔 회원국이니 유엔 헌장에 따라 양국 관계를 규율하면서 비정상적 특수관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비용과 위험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

사실 1991년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할 때 이미 두 개의 국가가 한반도에 존재한다는 것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고, 이것이 냉엄한 현실이다. 남북한이 유엔 회원국이니 두 나라 관계는 유엔 헌장 3, 4조에 따라야 한다. 즉 ‘양국은 분쟁을 평화적 수단에 의해 해결해야 하며 유엔의 목적과 양립하지 않는 어떤 방식으로도 무력 위협이나 행사를 해서는 안 된다’라는 유엔 규정을 지켜야 한다.

정상국가 간 관계로 전환하면 적잖은 이점이 생길 수 있다. 북한이 줄곧 미국을 최대 안보위협으로 여기는 것은 미국이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무너져야 할 정권’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북한을 정상국가로 간주하고 대해주면서 유엔 회원국으로서 의무를 준수하도록 요구하는 편이 북한의 태도 변화를 유도하는데 유리할 수 있다.

한국은 북한의 비핵화와 통일외교를 위해 그동안 외교·안보 자산을 너무 허비해왔다. 블랙홀처럼 소중한 자산을 빨아들이는 성취 불가능한 통일과 화해 과제에 더는 매몰되지 말아야 한다. 정상국가 관계로 전환해 한반도 안정이 가능하면 험난해지는 국제정세 속에서 한국이 헤쳐나갈 길을 찾는 데 더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정상국가 간 관계로 바꾸면 남북한이 서로 내정에 간섭하지 않고 무력도발을 하지 않으면서 상대를 덜 적대시하게 될 것이다. 북한이 도발하면 다른 나라처럼 똑같이 대응하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한반도 정세는 안정될 것이고 국제정치에서 한국이 이용당하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 남북 관계를 북한의 비핵화를 전제로 한 ‘담대한 구상’으로 바꾸려 하기보다는 차라리 정상국가 간 관계로 변경해야 한다. 한반도 안정을 도모하고 전쟁을 피하는 길이 더욱 대담하고 창의적인 발상이 될 것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백순 전 주호주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