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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안혜리의 시선

당신이 못 간 신혼여행에 드리운 문 정부 그림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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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지금 대한민국은 여권 대란이다. 전당대회를 앞두고 온갖 잡음을 내는 여권 국민의힘 얘기가 아니라, 진짜 여권(passport)이 문제다. 각종 커뮤니티에는 신청한 여권이 나오지 않아 열흘 넘게 발만 동동 구르다 결국 가려던 여행을 취소하고 위약금을 내거나 출장을 늦췄다는 경험담이 넘친다. 심지어 신혼여행을 제때 못 갔다는 사연도 있다. 발급 업무를 대행하는 구청 창구에서 두세 시간 기다리는 건 기본이고, 예상을 훌쩍 넘겨 보름 만에 겨우 발급된 여권을 찾는 데만 1시간 40분이 걸렸다는 사람까지 봤다. 이러니 민원이 폭주할 수밖에 없다. 이미 지난해 12월 서울 은평구청 야간 민원실 민원의 90% 이상이 여권 관련이었다. 실제로 지난달 평일에 종로구청 여권발급 창구에 가보니 발급신청 대기인은 오전 오후 할 것 없이 30명 가까이 됐고, 지난해 12월 중순만 해도 4일로 안내하던 소요 기간은 '평일 기준 8~10일'로 늘었다. 예년 상황을 기대하고 신청했다간 출국일을 못 맞춰 봉변당하기 십상이다.

지난달 18일 서울 종로구청 여권 민원실의 여권 신청 대기표. 지난해 12월만 해도 3~4일 걸리던 게 지금은 보름 넘게 소요된다. 연합뉴스

지난달 18일 서울 종로구청 여권 민원실의 여권 신청 대기표. 지난해 12월만 해도 3~4일 걸리던 게 지금은 보름 넘게 소요된다. 연합뉴스

세계 각국의 코로나 19 입·출국자 방역 완화 조치에 따라 지난해 하반기부터 폭발적으로 늘어난 여행 수요가 겨울방학과 맞물려 여권 발급 신청으로 이어진 게 직접적 원인이다. 한해 500만권 수준이던 여권 발급은 2021년 67만권까지 떨어졌다 지난해 9월 150만권을 회복했다. 이후 연말까지 석 달 동안 132만권(월평균 44만권), 그리고 올 1월에만 53만권이 발급됐다.
수요 폭증이 맞다. 하지만 이게 작금의 여권 대란을 전부 설명하지는 못한다. 충분히 예상된 상황이었던 만큼 여권 발급 업무를 담당하는 한국조폐공사가 보다 유연하게 대처했더라면 약간의 지체는 있었을지언정 불과 한 달 만에 발급에 걸리는 시간이 세 배 이상 늘어나지는 않았을 거란 얘기다. 결국 빈말이 됐지만 반장식 조폐공사 사장은 올 초 한 언론 기고문에서 '수요 폭증에 대비해 공백 여권을 충분히 비축했기 때문에 한꺼번에 요청이 쏟아져도 공급 차질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한 바 있다. 공백 여권이란 말 그대로 빈 여권이다. 미리 생산해뒀다가 신청이 들어오면 조폐공사 여권발급과에서 정보만 얹히면 된다. 조폐공사는 지난해 285만권의 공백 여권을 확보하기도 했고 자동화 생산설비를 갖췄기 때문에 설비를 가동할 최소한의 인원만 있다면 여권 발급이 이렇게까지 늦춰질 이유가 없다.
결국 일할 사람의 문제다. 평소 워라밸 좋기로 유명한 조폐공사의 조직문화, 그리고 이를 지탱하는 문재인 정부가 도입한 경직된 주 52시간 정책이 숨겨진 원인이라는 얘기다. 조폐공사는 코로나 초기인 2020년부터 순차적으로 비정규직 일용직인 여권발급원의 계약을 해지했다. 사측과 노동자 간에 다툼의 여지는 있으나 원론적으론 일이 없으니 사람을 줄인 걸 뭐라 할 수는 없다. 다만 일이 늘어나면 사람을 늘리거나 같은 인원으로 초과근무를 통해 늘어난 업무량을 소화하는 게 맞다. 하지만 조직 내 인력 재배치로 담당 업무자 수를 일부 늘린 건 지난달 하순에야 이르러서다. 추가 채용은 아예 없었다. 그렇다고 기존 인원이 밤이든 주말이든 집중적으로 근무해 늘어난 물량을 소화한 것도 아니다.
과연 워라밸 좋기로 유명한 조폐공사답다. 점점 실물화폐를 안 쓰는 추세라 조직의 미래는 불투명하고, 본사가 서울도 아닌 데다 금융공기업처럼 연봉이 높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직장인 커뮤니티나 채용플랫폼 평가를 보면 직원 만족도는 대한민국 최상위권이다. 워라밸 덕분이다. 원래부터 '돈(연봉) 적고 미래 불확실하지만 워라밸은 그거 다 포기할 정도로 개꿀'이라는 리뷰가 붙을 정도였지만 여권 업무가 폭주한 지금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10월 이후 쓰여진 리뷰에도 '워라밸 넘어 (워크는 없이) 라라밸 지향하는 이곳으로 오시오'라는 식의 내용이 적지 않다.
직원 만족도 높은 게 비난받을 일은 아니지만 공기업인 만큼 국민에 불편을 끼치면 안 된다. 하지만 현실은 업무가 폭주하든 말든 칼퇴로 직원만 행복하고 제때 서비스받아야 하는 국민은 고통받는다. 그런데도 이 조직에서 별다른 문제의식이 느껴지지 않는다. 특유의 조직문화에 더해 지난 문재인 정부가 도입한 강력한 주 52시간 정책 덕에 주 12시간을 넘기는 집중 근무가 사실상 불법이라 떳떳한 거다. 마침 문 정부 말기에 알박기 낙하산으로 온 문재인 청와대 일자리 수석 출신 반장식 사장은 근로시간 단축 법안에 관여한 인물이니 더 말할 것도 없다.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여행 수효 급증에 여권 발급 대란 #워라밸 중시 조폐공사 문화에다 #주 52시간 탓 유연 대응 못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