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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민의 퍼스펙티브

너무 많아진 공영방송, 나무보다 숲을 봐야할 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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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정민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출구 안보이는 공영방송 독립 논란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여야 입법전쟁이 불붙었다. 민주당이 지난 연말,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에서 방송 관련법 개정안을 단독 통과시킨 게 도화선이 됐다. 방송법(KBS)·방송문화진흥회법(MBC)· 한국교육방송공사법(EBS) 개정안이다. 정권이 ‘공영방송’ 사장 선임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특별다수제를 도입하자는 것이다. ▶현재 9~11명인 이사회의 이사 수를 21명으로 늘리고 ▶연령·지역·성별을 안배한 100인 국민추천위원회에서 사장을 추천하도록 했다. 지금까지 KBS는 11명의 이사를 여야가 7대 4 비율로, MBC·EBS는 9명의 이사를 6대 3 비율로 추천해왔다.

야당은 권력의 입김을 막아 ‘정권의 방송’이 아니라 ‘국민의 방송’으로 가는 개혁안이라고 강조한다. 반면 국민의힘은 ‘민노총 언론노조의 공영방송 영구장악 법안’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현재 법사위에 발이 묶인 상태지만 본회의 상정은 시간문제다. 여당은 대통령에게 거부권 행사를 건의하겠단 입장이다.

프랑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는 방송·언론을 대표적인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라고 했다. 강압적 기구만으론 정권 운영이 어렵기 때문에 방송같은 외곽 기구를 동원한다는 것이다. 알튀세르의 이론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낙하산 인사와 노조 파업, 편파 시비와 적폐청산 논란으로 누더기가 된 한국 공영방송의 흑역사와 맞아떨어진다. 공영방송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내부는 갈갈이 찢기고 신뢰는 추락했다. 편가르기 진영정치가 낳은 비극이자 후진국형 정치의 폐습이다.

그러나 이를 해결할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는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야당 땐 공영방송의 정치적 독립과 제도개혁을 부르짖다가 집권당이 되면 ‘전리품’ 챙기기로 돌변하는 ‘내로남불 정치’가 청산되지 않는 한 어두운 터널을 벗어나기 힘들 것이란 탄식이 곳곳에서 나온다.

야당 단독 처리 방송법 갈등 고조
국회가 추천하던 이사 몫 줄이고
방송·직능단체 참여 ‘특별다수제’

“시민참여로 정권의 방송 막아야”
“특정 노조의 공영방송 장악 의도”
전문가 “시장서 공익성 경쟁해야”

문재인 정권의 내로남불

민주당이 지난해 12월 2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에서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정이 담긴 방송 관련법을 단독 처리하자 국민의힘 소속 의원들이 피켓 시위를 하며 항의하고 있다. [뉴시스]

민주당이 지난해 12월 2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에서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정이 담긴 방송 관련법을 단독 처리하자 국민의힘 소속 의원들이 피켓 시위를 하며 항의하고 있다. [뉴시스]

정치권에서 공영방송 지배구조에 특별다수제 도입이 처음 논의된 건 2016년 9월이다. 박근혜 정부 시절이었다. 민주당 박홍근 의원(현 원내대표)등 야3당 국회의원 162명이 공동 발의해 개정안을 냈다. ▶KBS 이사회와 방송문화진흥회 이사회(MBC) 이사 수를 모두 13명으로 하고 ▶국회(여야 7대 6)가 이사를 추천하되 ▶야당의 동의없이 사장 선임을 할 수 없게 사장 선임시 이사 3분의 2이상 동의를 받도록 했다. 그러나 여당의 소극적 태도로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다가 대통령 탄핵 사태로 정권이 교체됐다. 여야가 뒤바뀌면서 방송법 개정 논의가 다시 급물살을 탔고, 국회 통과를 눈앞에 두게 됐다.

그런데 이번엔 문재인 정권이 변심했다. 후보 시절 토론회에서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공영방송을 장악해서 국민의 방송이 아니라 정권의 방송으로 만들었다”며 “정권이 방송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지배구조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문 대통령은 집권하자 표변했다. “기계적 중립을 지키는 소신없는 사람을 공영방송 사장으로 뽑는 것이 도움이 되겠느냐”며 황당한 언론관을 드러내더니, 언론적폐 청산을 앞세워 임기가 끝나지 않은 KBS와 MBC 경영진을 갈아치웠다.

제도 개혁이 물건너간 건 말할 것도 없다. 친 민주당 성향의 언론노조(민노총 산하)조차 “말로는 공영방송을 국민의 품으로 되돌려준다고 약속해놓고, 5년 내내 어떤 노력도 제대로 한 것이 없다”(윤창현 위원장)고 비난했을 정도다. 진보학자로 꼽히는 강준만 전북대 명예교수는 최근 경향신문 칼럼에서 “문재인의 변심에 맞장구를 친 민주당은 정권이 교체당하자 화들짝 놀라 윤석열 정권 출범 10여일 전에 자신들에게 유리하게끔 고안된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안’을 들고 나왔으니, 선의를 인정받으려면 우선 사과부터 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국민의 방송 vs 노영(勞營)방송

지난해 4월 지배구조 이슈가 재점화됐다. 민주당이 자당 소속 정필모(100인 국민추천위)·전혜숙(추천위에 시민단체·학계등 포함) 의원안과 국민의힘 박성중(특별다수제) 의원안 등을 짜깁기해 부랴부랴 개정안을 내놨다. 공영방송 이사(21명)에 대한 추천권을 ▶국회 5명 ▶시청자위원회 4명 ▶방송·미디어 관련 학회 6명 ▶직능단체(방송기자연합회·한국PD연합회·한국방송기술인연합회 각 2명) 6명이 갖는 최종안이 만들어졌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국민의힘은 ‘민노총 후견주의’라고 반발했다. 방송·미디어·직능단체 대부분이 친 민주당, 친 민노총(언론노조) 성향인 점을 들어 특정 세력이 주도하는 ‘노영(勞營) 방송’이 될 것이라고 비난했다. 실제로 언론노조는 개정안 처리를 끈질기게 요구하며 민주당을 압박했고, 개정안이 과방위를 통과하자 지지 성명을 냈다. 민노총 산하 언론노조 MBC본부 최성혁 본부장은 지난해 언론 인터뷰에서 “내년(2023년) 8월 이후 방통위 구도(위원 구성)가 바뀌는 상황에서 그 전에 시민참여 방식의 사장 선임 절차를 마련해두지 않으면 또다시 이명박·박근혜 권위주의 정권 환경으로 돌아가게 되기 때문에 공영방송 사장 선임 관련 법안에 모든 걸 걸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반면 MBC 제3노조의 시각은 180도 다르다. 제3노조는 “국회에서 민주당이 다수이고 언론학회와 직능단체들은 민주당 및 언론노조와 같은 목소리를 내온 진보세력 일색”이라며 “문재인 정부 때 기존 이사진과 사장들을 몰아내고 장악한 공영방송을 앞으로도 영구히 지배하겠다는 사악한 의도를 드러낸 것”이라고 비난했다.

대통령 권력과 의회 권력의 불일치라는 정치 환경에서 빚어진 힘의 공백을 언론노조가 파고들며 지배력을 장악하려 한다는, 노영방송 논란이 불붙은 이유다. 이게 가능해진 배경에 대해 이인철 변호사(전 방문진 이사)는 “2018년 지상파 방송사가 노사 동수의 편성위원회를 만들면서 방송 사주의 권한이던 편성권을 노조가 나눠갖게 돼 노영방송의 제도적 기초가 마련됐다”고 분석했다.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공영방송 난립

노영방송 논란은 공적 지분이 들어간 공영 채널이 과도하게 난립하고 있는 한국적인 특수성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황근 선문대 교수는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이뤄진 언론 통폐합이 민주화 이후에도 정상화되지 못하고 그 틀이 유지돼온 데 근본 원인이 있다”며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공영방송 과대성장 국가가 됐다”고 주장했다. 상당수 전문가들이 이런 견해에 동의한다. 김동률 서강대 교수는 “민간 상업방송과 달리 지나치게 많은 공영방송은 궁극적으로 전체 국민의 부담으로 작용한다”며 “영국의 BBC, 일본의 NHK 처럼 선택과 집중을 통해 세계시장에 통하는 국가대표 K방송을 육성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방송 관련법 어디에도 ‘공영방송’의 개념과 규범이 명확히 정의돼 있지 않다. 그러다보니 공공지분이 들어간 채널을 편의상 공영방송으로 통칭할 뿐이다. 이런 잣대로 볼 때, 공적 지분이 들어간 주요 방송은 KBS1·2, MBC, EBS, YTN, 연합뉴스TV, 교통방송등 10개를 훌쩍 넘는다. 지상파만 놓고 보면 ‘1민영(SBS) 다(多)공영’ 구조다.

문제는 ‘공영=공익’으로 인식되면서 대주주 지분 제한 예외 인정, 의무 송출, 국고 지원등 상업방송과는 비교할 수 없는 특혜를 누리면서 방송시장을 왜곡하는 데 있다. 여당의 방송시장 재구조화, MBC·YTN 민영화 주장은 ‘무늬만 공영’ 방송이 너무 많다는 이같은 문제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정부는 YTN에 대해선 공공지분 매각을 결정한 상태다. 노조는 언론탄압이라고 맞서고 있다.

공영방송 논쟁은 ▶정권 ▶자본 ▶노조로부터의 독립 문제에 매몰돼 여야와 진영이 극한 대립하는 구도로 흘러가고 있다. 남인용 부경대 교수는 “상업화된다고 공공성이 훼손되는 것도 아니지만 공영방송 숫자를 줄여 민영화한다고 공공성이 더 커지는 것도 아니다”며 “이분법에서 벗어나 공적 재원이 들어간 방송을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 방향 정립부터 새롭게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나무(독립성 논란)에 가려 숲(공익성 제고)을 보지 못하는 현실을 지적했다.

같은 맥락에서 대기업 임원의 고언은 새겨들을만 하다. 기업에서 오랫동안 대언론 업무를 해온 그는 “공영방송이란 타이틀을 갖고 너무 쉽게 강한 기득권을 누리며 무임승차해온 측면이 크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며 “공영방송끼리도 시장주의 속에서 공공성과 공익성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해 소비자의 선택을 받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독립성 논란에서 벗어나 어떻게 공익성·경쟁력을 갖춘 공영방송을 만들어갈 것인지 공론화를 시작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