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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준이 될 순 없어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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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경희 기자 중앙일보 기자
김경희 경제부 기자

김경희 경제부 기자

20대 공무원 A는 지난해부터 매주 로또를 산다. 물가도 금리도 치솟았지만, 실질임금은 도무지 오르지 않는 시대에 로또만이 비빌 언덕이라서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 1~11월 물가수준을 반영한 근로자 1인당 월평균 실질임금은 354만9000원으로, 전년 동기와 같았다. 하지만 같은 기간 소비자물가는 5.1%나 뛰었다. 월급이 올라봤자 통장을 스칠 뿐이란 얘기다.

불황을 먹고 자라는 복권은 경제가 어려울수록 잘 팔린다. 지난해 복권 판매액은 6조4000억원으로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2019년까지 4조원대를 유지하다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강타한 2020년 5조원을 돌파하더니, 2년 만에 6조원대로 진입했다. 경기 흐름을 그대로 반영하는 수치다.

30대 회사원 B는 요즘 ‘보복소비’에 열을 올리고 있다. ‘짠테크’가 유행인 시대 흐름에 다소 역행하는 것 같지만 그는 자신만의 생존법이라고 항변한다. 월급의 일부는 오로지 자신을 위해 써야만 또다시 팍팍한 일상을 살아갈 동력이 생긴단다. 사실 따지고 보면 보복소비가 꼭 자신만을 위한 건 아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지난해 4분기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 0.4%다. 2020년 상반기 이후 첫 분기별 역성장이다. 수출 부진에 민간 소비까지 얼어붙으면 올해 1분기도 마이너스 성장일 거란 우려가 나온다. 다만 한국은행은 1월 개인 신용카드 사용액이 전년 대비 증가 추세라 좀 더 지켜봐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보복소비는 침체한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는 측면에서 일종의 애국이다.

고물가, 고금리, 고환율의 3고(高) 시대다. 우리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 시기를 견뎌내고 있다. ‘영끌’ ‘빚투’ 등 시류에 휘말리지 않고 중심을 잡았더라면, 지금 저평가된 부동산이나 주식을 사서 자산을 늘릴 수 있었을 거란 가정을 해봐야 속만 상할 뿐이다. 로또 구매나 보복소비가 주는 위안도 효과가 길진 않은 것 같다.

“이제 시작이다. 당신의 위기, 나의 기회.” 지난해 말 종영한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1997년 IMF 외환위기가 터지자 주인공 진도준이 한 말이다. 수많은 기업이 파산하고 달러당 원화값은 1900원대까지 하락했던 시절, 미래에서 왔기에 모든 걸 알고 있던 진도준은 미국 주식 아마존에 투자해 엄청난 수익을 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 사이클’을 이해하고 대비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되는 대목이다. 우리가 진도준이 될 순 없어도, 단지 대리만족에 그치진 말았으면 한다. 경제 공부하기 참 좋은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