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없어서 못파는 K와인…'청수' 뒤엔 1세대 소믈리에 열정 있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한국 소믈리에 1세대 정하봉 씨가 서울 잠실 소피텔 앰배서더 호텔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전민규 기자

한국 소믈리에 1세대 정하봉 씨가 서울 잠실 소피텔 앰배서더 호텔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전민규 기자

'청수'라는 두 글자에 입에 침이 고이고, '추사'라는 두 글자에 달콤함을 떠올린다면, 당신은 한국산 와인 전문가라 할 만하다. 정하봉(46) 소피텔 앰배서더 서울 호텔 식음 총괄 부장처럼 말이다. 정하봉 총괄은 와인 소믈리에로서는 처음으로 특급호텔의 꽃인 식음료 부문을 총괄하는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한국국제소믈리에협회 부회장도 맡고 있는 그에게 오는 2월은 각별하다. 그가 직접 출전하기도 했던 세계 소믈리에 대회에 국가대표 코치 자격으로 참석해서다. 올해는 팬데믹 터널의 끝이 보이는 데다, 와인 종주국이라 할 수 있는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다. 정 총괄 역시 출전했던 대회로, 각국에서 내로라하는 소믈리에들이 와인에 대한 맛과 경험과 지식의 일합을 겨룬다. 준비에 여념이 없는 그를 최근 만났다.

정 총괄은 한국 소믈리에 계의 산증인이다. 와인을 마시는 일이 잘난 척하는 것처럼 여겨지던 때부터 그는 와인에 탐닉했다. 시작은 우연이었다. 그가 2000년 첫 직장이었던 호텔에서 명품 브랜드의 국제회의가 열렸는데, 참석자들 사이에서 "호텔 측의 와인 추천 역량이 부족하다"는 요지의 불만이 나온 것. 당시 한국은 와인 불모지에 가까웠던 까닭이다. 호텔 측에서 와인 전문가를 물색하기에 이르렀고, 정 총괄이 낙점을 받았다. 그는 "원래 식음료 문화에 대한 호기심이 강했는데 와인의 세계는 특히나 무궁무진했다"며 "깊고도 넓은 그 세계에 바로 빠져들었다"고 말했다. 이탈리아 피에몬테부터 프랑스 보르도 등 세계적 와인 산지를 다니며 경험을 쌓았다.

와인은 이제 한국인의 생활에서 뗄래야 뗄 수 없는 일부다. 전민규 기자

와인은 이제 한국인의 생활에서 뗄래야 뗄 수 없는 일부다. 전민규 기자

노력은 성과로 이어졌다. 그는 2005년부터 매년 국가대표 소믈리에로 선정됐으며, 각종 세계 대회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거뒀다. 프랑스 샴페인 협회에선 2017년 그에게 슈발리에(Chevalier) 기사 작위를, 2년 뒤 보르도 와인 협회에선 꼬망드리(Commanderie) 작위를 달아줬다.

그런 그에게 최근 수년 간 한국 와인 시장의 성장세는 놀랍다. 그중에서도 정 총괄이 주목하는 건 '메이드 인 코리아' 와인이다. 한국에서 와인을 만든다? 생소할 수 있지만 이미 일명 MZ(밀레니얼+Z세대) 사이에선 입소문이 자자하다고 한다. 처음부터 훌륭하진 않았다. 그는 "2007~2008년 국내 와인은 인공 향을 첨가해서 와인을 흉내내는 수준인 경우가 있어서 심사위원으로 갈 때마다 얼굴 붉힐 일이 많았다"며 "그러나 그간 많은 선구자들이 노력한 덕에 이젠 세계적 수준으로 발돋움하고 있다고 자신한다"고 말했다.

경기도 안산 대부도에서 만들어지는 그랑 꼬또 와인은 국제와인기구(OIV)에서 인정하는 시상식, 아시아 와인 트로피에서 지난해 은메달을 따냈다. 추사 와인은 한국식 사과술로, 달콤하면서도 깊이 있는 맛이 일품이다. 한국농업과학원이 화이트 와인용으로 품종 개량한 '청수'로 만든 와인도 없어서 못 팔 정도라고 한다.

정하봉 소믈리에가 와인 관련 강의를 하고 있다. 그에게 와인은 단순히 마시는 것을 넘어 인문학의 한 갈래다. 전민규 기자

정하봉 소믈리에가 와인 관련 강의를 하고 있다. 그에게 와인은 단순히 마시는 것을 넘어 인문학의 한 갈래다. 전민규 기자

그런 성장 뒤엔 그의 노력도 있었다. 그가 한국 와인을 테마로 한 만찬 행사를 꾸준히 기획하고, 생산자들을 직접 초청해 소비자들에게 한국 와인의 존재를 알렸다. 그는 "한국의 문화엔 음악과 영화만 있는 게 아니다"라며 "이젠 미식의 분야에서도 한국의 존재감이 뚜렷해지고 있으며, 그렇기에 더더욱 한국만의 와인을 더 가꾸고 알려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와인은 단순히 마시는 음료 이상으로 인문학의 향기를 더할 수 있는 문화"라며 "피에몬테 와이너리에서 단순히 레드 와인을 마시는 데 그치지 않고 이탈리아의 문화와 역사를 논하게 되듯, 한국도 충분한 잠재력이 있다"고 자신했다. 이제 곧 파리행 비행기를 타는 것도 같은 노력의 맥락이기도 하다. 그는 "올해 파리에서 열리는 소믈리에 대회에서도 한국 와인과 소믈리에의 존재감을 더 각인시킬 것"이라고 각오를 다졌다.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