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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친자'들의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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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극장 안 열기가 뜨거웠다. 30대로 보이는 옆자리 두 남성이 자꾸 눈물을 훔쳤다. 유명한 대사가 나오는 장면에서는 짧은 탄성을 뱉었다. 개봉 4주 차 박스오피스 1위로 역주행하며 200만 명에 육박하는 관객을 모으고 있는 일본 극장판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 얘기다. 1990년대 큰 인기를 끈 농구 만화 ‘슬램덩크’의 후속작이다. 당시 원작 만화의 팬이던 3040이 흥행의 중심에 서고 1020이 가세하는 모양새다. 원작 만화뿐 아니라 관련 출판물, 굿즈도 날개 돋친 듯 팔린다. 지난 주말 서울 여의도 더 현대에 마련된 팝업 스토어에는 피규어와 유니폼 등을 사려는 수백 명의 젊은 팬이 영하의 날씨에도 새벽부터 ‘오픈런’(입장 대기)을 했다. 좋아하는 것은 ‘파고 또 파고’ 과소비하는 ‘디깅(digging)’ 컬처의 일환이다. SNS에는 26년 만에 돌아온 ‘슬램덩크’를 ‘알현’한 감동 후기와 오랜 덕심을 고백하는 찬양 글, 영상이 쏟아진다. ‘슬램덩크에 미친 자’라는 뜻의 ‘슬친자’라는 말도 나왔다. 보고 또 보는 N차 관람도 이어진다. ‘슬램덩크’는 SBS에서 TV 만화영화로 방영된 적도 있어서, 당시 성우의 목소리를 또다시 들을 수 있는 더빙판도 인기다.

1990년대 문화의 아이콘 '슬랭덩크'. 원작 출판 만화 연재가 끝난 뒤 26년만의 후속작인 극장판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사진 에스엠지홀딩스]

1990년대 문화의 아이콘 '슬랭덩크'. 원작 출판 만화 연재가 끝난 뒤 26년만의 후속작인 극장판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사진 에스엠지홀딩스]

1998년 일본 대중문화 개방에 앞서 92년 국내 출간된 원작 만화는 청소년들의 필독서였고, 90년대 농구 붐을 불러왔다. 약체인 고등학교 농구부가 전국 제패를 꿈꾸며 성장해 가는 ‘언더독’ 스토리다. 요즘 유행하는 ‘중꺾마’(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의 원조인 셈이다. “왼손은 거들 뿐” “포기를 모르는 남자” “감독님은 언제가 전성기입니까? 전 지금입니다” “포기하는 순간 시합 종료” 같은 명대사가 유명하다. 명대사들은 밈(유행 짤)이 돼 인터넷에 퍼졌고, 이에 친숙한 1020이 이번에 새롭게 ‘슬램덩크’ 팬으로 유입되기도 했다. 원작 만화는 일본에서 1억7000만 부, 우리나라에서 1450만 부가 팔려 나갔다. 90년대 아시아를 뒤흔든 일본 만화의 위상, 한류에 앞서 우리 대중문화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쳤던 J콘텐트의 위력을 떠올리게 한다.

돌아온 '슬램덩크'가 극장가와 서점가 등을 흔들고 있다. 영화 개봉과 함께 나온 만화 '슬램덩크 챔프'가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에 '슬램덩크 프리미엄 박스판'이 진열된 모습.   [사진 뉴스1]

돌아온 '슬램덩크'가 극장가와 서점가 등을 흔들고 있다. 영화 개봉과 함께 나온 만화 '슬램덩크 챔프'가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에 '슬램덩크 프리미엄 박스판'이 진열된 모습. [사진 뉴스1]

 영화는 OTT 시대 극장의 살길도 보여준다. 영화는 일종의 ‘추억 소환 여행’ 이벤트로 소비되는데, 이는 최근 놀라운 기술력의 향연으로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아바타 2’가 그랬듯, 단지 좋은 영화를 보러만 극장에 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특별한 ‘체험’ 장소로서의 극장이다. 원작자인 이노우에 다케히코 감독이 극본ㆍ연출을 맡은 영화는 컴퓨터그래픽(3D)과 손 그림(2D)을 적절히 배치하고, 캐릭터를 좇는 카메라의 시선으로 선수들의 움직임을 밀착해 잡아내며 남다른 박진감을 선사한다. ‘신과 함께’의 만화가 주호민은 “만화책이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라고 평했다.
그런데 슬램덩크의 열혈팬인 40대 남성은 지난 정부가 불붙인 ‘노재팬’(일본 제품 불매) 운동 등 반일 정서의 핵심층과도 겹친다. 실제 영화 초기엔 일부 친야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노재팬인데 일본 영화가 웬 말이냐’는 비판 글이 올라오기도 했는데, ‘내 청춘의 일부다. 취향을 존중하라’는 반박에 힘을 잃었다. 현재 국내 극장가에는 ‘슬램덩크’ 외에 일본 로맨스 영화 ‘오늘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가 100만을 돌파하며 조용한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일본 (실사)영화가 국내에서 100만을 돌파한 것은 2003년 ‘주온’ 이후 20년 만이다. 애니메이션으로는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이 노재팬 운동이 한창이던 2021년 215만 명을 모아 눈길을 끌었었다. ‘정치는 정치, 문화는 문화’로 받아들이는 젊은 관객의 증가, 정치적으로 기획된 대중 정서의 유효기간을 보여준다. 다른 한편으론 여전한 한·일 간 정치적 갈등을 푸는 주요한 길이 문화에 있다는 생각도 새삼 하게 된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국내 인기와 함께 일본 넷플릭스에서는 ‘낮과 밤’ ‘더 글로리’ 등 5편의 한국 드라마가 톱10(TV쇼)에 오르며 한류 붐을 이어가고 있다.

‘노재팬’에도 추억 소환 3040 열광 # ‘중꺾마’ 코드에 ‘디깅 컬처’ 결합 # 정치를 누르는 문화의 힘 보여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