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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재훈의 음식과 약

왜 초콜릿을 사랑하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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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정재훈 약사·푸드라이터

정재훈 약사·푸드라이터

초콜릿은 사랑의 묘약이 아니다. 초콜릿에 기분 좋게 하는 화학물질이 들어있다는 이야기는 팩트 체크 안 하던 시절에 만들어진 허구에 가깝다. 각성 효과를 지닌 페닐에틸아민(PEA)이란 물질이 초콜릿 속에 들어 있긴 하다. 하지만 실제로 효과를 내기엔 너무 적은 양이다. 2005년 이탈리아 연구팀이 분석한 결과 초콜릿 1㎏에 PEA는 겨우 3㎎이 든 것으로 나타났다. 초콜릿을 만드는 과정에서 양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초콜릿을 먹는다고 PEA가 뇌로 들어가지도 않는다. 대부분은 그저 대사되어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사라진다.

초콜릿은 정말 사랑의 묘약일까. [AP=연합뉴스]

초콜릿은 정말 사랑의 묘약일까. [AP=연합뉴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초콜릿을 사랑하는가. 초콜릿이 입속에서 주는 특별한 느낌 때문이다. 1994년 저명한 음식심리학자 폴 로진 교수는 실험으로 이를 증명했다. 그는 초콜릿에 대한 욕구를 느낄 때 밀크초콜릿, 화이트 초콜릿, 코코아 가루를 넣은 캡슐, 화이트 초콜릿+코코아 가루 캡슐, 가짜 알약, 그냥 물만 마시는 6가지 경우를 비교했다. 실험 결과, 밀크초콜릿에 가장 가까운 효과를 낸 건 화이트 초콜릿이었다. 화이트 초콜릿에는 지방 외에 초콜릿 성분이 들어 있지 않다. 하지만 화이트 초콜릿을 먹으면 초콜릿의 69%까지 참가자의 욕구가 채워졌다. 반면에 코코아 고형분이 들어있는 가루로는 참가자들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초콜릿에 특별한 성분이 들어있는 게 아니다. 입속에서 녹아내리는 초콜릿의 물성이 특별한 거다.

그 특별한 물성은 지방 덕분이다. 올해 1월 영국 리드대 과학자들이 밝혀낸 사실이다. 연구팀은 초콜릿이 녹는 과정을 단계별로 분석했다. 처음에는 초콜릿이 자체적으로 또는 침과 섞여 녹으면서 나타나는 윤활작용이 중요하다. 이때 지방이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후에는 초콜릿 속의 코코아 고형분이 녹아 나오면서 촉감을 자극한다. 첫 단계에서 표면의 지방이 녹아내리고 나면 코코아 고형분이 역할을 이어받아 입속을 간지럽힌다는 설명이다.

과학자들은 이런 원리를 응용하여 물성의 만족감은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지방 함량을 크게 낮춘 초콜릿을 개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쉽게 말해 코코아 유지는 겉면으로 집중시키고 속에는 고형분을 넣는다면 저칼로리이지만 맛좋은 초콜릿을 만들 수 있을 거란 얘기다.

감성이 메마른 과학자들이 낭만을 깨뜨린다며 푸념하지 말자. 초콜릿 속에 묘약과 같은 성분이 들어있다고 믿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이다. 비록 과학자들이 밝혀낸 사실은 그렇지 않지만 그래도 괜찮다. 인간이란 그저 입속에서 사르르 녹는 초콜릿의 물성만으로도 만족하며 기뻐할 수 있는 존재이다. 눈 오면 눈 구경하고 눈 녹으면 싹트는 걸 보면서 기분이 좋아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효능 따지지 않아도 된다. 음식이 맛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인생이다.

정재훈 약사·푸드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