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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은 홀로 있기 좋은 달이라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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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원영 스님 청룡암 주지

원영 스님 청룡암 주지

스산한 느낌이 들어 문을 열어보니, 기척도 없이 눈이 내린다. 세상의 모든 악업과 인간의 죄업을 다 덮어버리듯 근엄하고도 부드럽게 온다. 그러나 바람까지 불어 맞고 걷기엔 별로인 눈발이다. 눈을 보고 있노라니 며칠 전 보고 온 붉은 동백이 눈가에 선하게 비쳤다. 어디쯤에선 매화 소식도 화사하게 들리던데, 단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매화향이 그리워지는 아침이다.

예전에는 지척에 매화가 있어 때가 되면 잊지 않고 쫓아가 향기를 품어 돌아왔는데, 서울에선 그러질 못했다. 고작해야 꽃시장에서 사 온 나뭇가지를 백자항아리에 꽂아두고 완상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고요히 앉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은은하게 다가와 나를 깨워 벗이 되어주었다. 그리 아쉬운 듯 감상해도 파리한 승려에게 있어 매화는 늘 고매하고 우아하여 각별한 정서를 안겨준다. 출가승의 고독 따위야 아무렴 어떠랴 싶게….

매화와 다향이 어우러지는 시간
시인 천양희가 권한 2월의 고요
내면의 힘 응축시킬 ‘나만의 길’

오늘 내 곁에 매화는 없으나 홀로이 어울리는 차라도 한잔해야겠다. 하늘빛 도는 여릿한 다관을 꺼냈다. 녹차에 매화 한 송이 띄었더라면 멋지게 어울렸을 텐데, 아쉬움을 뒤로 하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물을 따랐다. ‘정좌처다반향초(靜坐處茶半香初)’라 하였던가. 차 한 모금 머금자 입안에 향이 차오른다. 얼른 법당으로 건너가 향도 하나 피워 올렸다. 은은한 녹차 향 끝에 스미는 침향이라, 그야말로 향미(香味)가 잔치를 한다.

알다시피 스님들은 매화를 유독 좋아한다. 승속을 떠나 매화향기를 싫어할 사람이야 없겠지만, 이름 있는 고찰에 오래된 매화 한 그루 정도 다 있는 걸 보면, 저 윗대 스님들도 꽤나 좋아하신 모양이다. 통도사 홍매나 선암사 백매가 그러하듯, 오래된 법당 곁의 묵은 매화는 오랜 세월 함께한 출가승의 벗인 게다.

옛 선사의 이름에도 꽃이 피었다. 황매(黃梅) 선사도 있고, 청매(靑梅) 선사도 있으니 말이다. 황매 선사는 혜능대사의 스승으로 유명하고, 청매 선사는 서산대사를 시봉한 승병장으로 알려진 분이다. 특히 청매 선사가 남긴 ‘십무익송(十無益頌)’은 후학들에게 큰 가르침으로 남아있어, 그분의 의로운 향기가 더 진하게 전해진다. 내용은 이러하다.

“마음을 돌이켜 살피지 않으면 경(經)을 보아도 이익이 없고, 성품이 공(空)한 것을 모르면 좌선을 하여도 이익이 없으며, 원인을 가벼이 여기고 결과만 중히 여겨 도(道)를 구하여도 이익이 없느니라. 아만을 꺾지 않으면 법(法)을 배워도 이익이 없고, 바른 법을 알지 못하면 고행을 하여도 이익이 없으며, 마음에 진실한 덕이 없으면 교묘한 말을 잘해도 이익이 없느니라. 남의 스승이 될 만한 덕이 없으면 제자를 모아도 이익이 없고, 안으로 실덕(實德)이 없는 이는 밖으로 위의를 가장해도 이익이 없느니라. 인생을 괴각으로 지내면 대중(大衆)에 살아도 이익이 없으며, 교만(驕慢)이 뱃속에 차 있으면 계를 지켜도 이익이 없느니라.”

가르침이 어찌나 성성한지, 이 글을 읽고 나면 나도 모르게 “예, 스님”하고 대답하게 된다. 서릿발 같은 기개가 글 속에 살아있음이다.

그나저나 눈 덮인 동백과 매화가 한겨울의 동기인 줄로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 한다. 동백은 가장 늦게 피는 꽃이요, 매화는 가장 처음 피는 꽃이란다. 마지막에 피는 꽃과 처음 피는 꽃이 함께 한다니 실로 묘한 어울림이 아닌가. 사람도 꽃처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데, 더러는 그 관계가 불편하고 무겁다. 어쩌면 이맘때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바쁜 연초에 명절까지 지났으니, 이젠 좀 고요함 속에 파묻히고 싶은 때이다. 그렇기에 2월은 홀로 있기 좋은 달이다.

얼마 전 선물 받은 천양희 시집에 ‘2월은 홀로 걷는 달’이라는 시가 있었다. 책을 건네주던 맘씨 좋은 스님은 “눈도 안 좋으니 두꺼운 책 보지 말고, 잠깐 읽고 많이 생각할 수 있는 시집을 보세요”라고 했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받아든 시집 속에 ‘헤맨다고 다 방황하는 것은 아니라 생각하며/ 미아리를 미아처럼 걸었다’로 시작하는 시가 있었다. ‘지나가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며 걸었다’는 시가 퍽 쓸쓸했다.

그러나 시의 풍경을 떠올리며 걷다 보니 처음엔 무겁다가 점점 가벼워지고, 이내 굳건해짐을 느꼈다. 생을 돌아보며 걷다 보면 사색은 더욱 깊어지고, 가파른 길도 숨 고르며 견딜 수 있는 내면의 힘이 응축되겠지. 그런 힘을 지니려면 홀로 있는 시간을 잘 보내야 한다. 눈서리에도 당당한 저 매화처럼 동백처럼 무소의 뿔처럼. 적어도 자신을 외롭게 만드는 사람들과 함께 있느니, 혼자 있는 편이 훨씬 나을 테니 말이다.

원영 스님 청룡암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