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최정 700승, 신진서 35연승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7면

신진서 9단과 최정 9단이 같은 날 나란히 멋진 기록을 썼다. 무대는 지난 토요일 KB바둑리그 Kixx와 울산고려아연의 대결장. 울산고려아연의 2지명 최정이 Kixx의 김창훈을 격파하며 700승을 달성했다. 여자바둑에선 사상 최초다.

잠시 후 고려아연의 주장 신민준이 Kixx의 김승재를 꺾어 2대0으로 앞섰다. 그러나 Kixx는 박진솔이 한웅규를 이기고 주장 신진서가 홍무진을 눌러 2대2를 만들었고 에이스 재대결에서 신진서가 신민준을 격파해 3대2로 승리했다. 신진서가 바둑리그 35연승을 달렸다. 물론 신기록이다. 한국바둑의 보물, 신진서와 최정이 같은 날 같은 무대에서 역사에 남을 기록을 세웠다.

최정

최정

최정의 700승은 프로입단 12년 8개월 만에 거둔 쾌거다. 최정보다 13년 먼저 프로가 된 조혜연 9단이 678승으로 2위다. 최정이 무척 빠른 속도로 달려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정은 “1000승에 도전하겠다”고 말했다. 지난해 무려 78승을 거뒀으니 이 속도를 유지한다면 5년이면 목표를 달성할 것이다.

남자 기사 중에는 1000승 이상을 거둔 기사가 15명이나 된다. 최다승은 조훈현의 1959승.

여자기사는 성적만 낸다면 남자보다 대국 수가 많아진다. 최정은 남자를 많이 이겼다. 유일한 홍일점인 바둑리그서도 4승 1패로 성적이 상위권이다. 최정은 그러나 700승을 거두는 동안 305번을 졌다. (승률 69.65%) 남자들과의 바둑에서 쉬운 승리는 없다.

신진서

신진서

신진서는 ‘기록제조기’로 불린다. 30년 전 이창호의 별명이 신진서에게 옮아갔다. 그러나 지난 토요일 밤으로 다시 돌아가면 연승을 거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되새기게 된다. 신진서의 상대는 홍무진. 랭킹이 35위니까 상당한 실력자가 분명하지만 나이는 신진서보다 6살 많고 프로 입단은 3년 후배다. 우승경력도 없다.

한데 대국은 시종 홍무진이 간발의 우세를 보이며 이어나갔다. AI의 막대 그래프는 계속 백을 쥔 홍무진의 우세를 가리켰다. 홍무진이 정말 잘 두었으나 결과는 신진서의 반집승. 그야말로 진땀 나는 반집승이었다. 신진서는 매번 이기는 것 같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기막힌 사연들이 줄줄이 숨어있다. 이런 시련을 이겨내며 최고의 스토리를 써가고 있는 신진서는 참으로 놀라운 기사다.

한국바둑은 총 전력에선 중국에게 밀리지만 일인자가 중국보다 강하다. 이창호-이세돌 시절도 비슷한데 그 현상이 다시 신진서로 대물림 되는 것을 지켜보며 중국은 탄식할 것이다. 돌아보면 이세돌에서 신진서로 이어지는 그 틈새에서 중국은 크게 일어나 한국을 압도했다. 그때는 중국바둑의 득세를 막을 방법이 없어 보였다. 신진서가 한국바둑을 다시 살렸다.

그러나 다시 토요일 밤의 바둑리그로 돌아가면 뭔가 마음을 짓누르는 불편함을 떨칠 수 없게 된다. 신진서가 그 밤에 두 판을 연달아 둔 것이다. 벌써 여러 번째다. 혼자 자문해본다. 최고의 기사를 이렇게 소모해도 되는가.

2대2 상황에서 벌어지는 에이스 결정전이 재미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자정을 넘기더라도 기어이 승부를 내버리는 것이 2대2에서 그냥 끝나는 중국리그보다 화끈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룻밤에 두 판’은 심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최정과 신진서가 각종 이벤트에 자주 동원되는 것도, 두 개의 바둑 채널이 신진서와 최정 바둑만 계속 보여주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다시 생각해야 한다. 그건 다른 수많은 기사와 수많은 바둑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일이다. 두 기사는 바둑 홍보에 몸을 아끼지 않는 편이다. 스타인데도 겸손하고 비싸게 구는 법이 없다. 참으로 훌륭한 일인자들이다. 그러나 그걸 빌미로 마구 쓰는 일은 없어야 한다. 품격을 지켜야 한다. 스폰서들은 두 기사를 누구보다 원하겠지만 형편이 어려울수록 가보를 소중히 여기는 게 맞을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